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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설렘을 사고 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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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2월 20, 2026 12: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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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시인, 수필가)

요즘, 블라인드 형식의 판매가 유행이다. 미국 책방에나 가야 볼 수 있던 블라인드 북은 이제 낯설지 않지만, 블라인드 장난감 인형까지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본 서적과 문구를 파는 ‘Kinokuniya’나 ‘TESO’ 등에서 팔긴 했는데, 종류가 많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쇼핑몰 안에 대형 매장이 들어서 성업 중이다. 그중 하나가 ‘POP MART’다. 매장에는 개성 있고 완성도 높은 캐릭터 인형들이 화려하게 진열돼 있다. 자체 브랜드뿐 아니라, 디즈니나 인기 캐릭터를 보유한 회사와 협업한 제품들이 많아서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신상품 출시나 팝업 행사가 있을 때면 매장 문을 열기 전부터 줄이 늘어선다. ‘라부부’ 인형이 유행했을 때는 입고되자마자 동나서 돈이 있어도 사기 어려웠다. 돈이 되는 사업이 라는 소문이 돌면 우후죽순 생기게 마련이다. 오랜만에 몰에 가보니 이미 유사한 매장들이 입점해 있었다. 특정 회사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블라인드 형식의 판매 방식 자체가 궁금했다.


지인 중에 자영업자가 많은데, 이구동성 매출이 반 토막 났다고 앓는 소리를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불경기 중에도 고가의 아이돌 공연 티켓은 몇 분이면 매진되고, 어떤 상품은 출시되자마자 품절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물론 전쟁 중이나 팬데믹 시기에도 돈을 번 업종이 있다. 결국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건데, 대체 무엇이 이런 수요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딸과 처음 그 매장에 갔을 때, 손님 많아서 놀랐고 인형 종류가 많아서 놀랐고 돈이 있어도 원하는 걸 못산다는 사실에 놀랐다. 한 세트가 12개, 6개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주목할 점은 박스 포장이 모두 똑같다는 거다. 열기 전까진 내용물을 알 수 없다. 세트를 통째로 산다면 원하는 걸 단번에 가질 수 있지만, 낱개로 사면 확률은 낮아진다. 그래서 원하는 게 나올 때까지 계속 사게 되는 거다. 그런 심리를 이용한 게 블라인드 마케팅의 전략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시크릿이라는 아이템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세트에 없는 희귀 인형인데,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몇 배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시크릿이 나오면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기뻐하는 이유다.


처음에는 줄까지 서서 사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갈 때마다 하나씩 사다 보니 나중엔 세트를 모두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사서 원하는 인형이 나온 적은 없다. 몇 개를 사도 나오지 않으니 이미 쓴 돈이 아까워 한 번만 더 사 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매몰비용의 심리다. 이미 지불한 비용 때문에 추가 지출을 계속하게 되는 현상이다. 쓴 돈은 되돌릴 수 없는데, 실패한 일에 또다시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오류를 범하는 거다. “사람은 이익으로 얻은 기쁨보다 손실로 인한 고통을 더 크게 느끼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라고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는 설명했다. 사업자 입장에서 보면 그런 심리가 곧 수익 구조일 수도 있다. 아주 틀린 비유는 아닐 것이다. 매몰비용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손해를 잊고 포기하는 건데, 그게 쉽지 않다. 카지노에서 게임하다 돈을 잃으면 본전 생각에 쏟아붓다 전 재산 날리는 사람이 그래서 생기는 거다.


한 세트까지 산 후 소비심리가 이해되었다. 책장에 늘어선 인형을 보면 헛웃음이 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비를 하고 얻은 결론은 어쩌면 소비자가 사는 것은 인형이 아니라 가능성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순간 설렘이 시작되고 상자를 열어 확인하기 전까지 상상의 나래를 펴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보상이 가장 강한 만족을 준다고 배웠다. 랜덤 상품은 감정을 사고 판다. 설렘은 형태가 없지만 가치는 있으니까.


며칠 전 KODAK에서 출시한 ‘CHARMERA’ 한 박스를 샀다. 손가락만 한 초소형 미니카메라가 6개 들었는데, 그 또한 랜덤 박스라 내용물을 모른다. 시크릿 아이템도 있다. 열쇠고리나 가방에 걸 수 있어서 카메라가 아니라 ‘차메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기업에서도 랜덤 박스 상품에 관심이 생겼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랜덤 인형을 상술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취미고, 위로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 뽑기 놀이를 다시 만나는 경험일 것이다. 매장에 줄 선 사람들의 표정에서 설렘과 기대에 찬 모습을 본다. 원하는 걸 갖게 되었을 때의 기쁨을 가격으로 환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상자를 하나씩 들고 산다. 내일이 어떤 하루일지 모르면서 알람을 맞추고,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일을 시작한다. 미래는 랜덤 박스와 닮아있다. 그래서일까. 상자를 여는 순간의 설렘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삶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손바닥 위에서 작은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확신한다. 아직 열어볼 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하다고. 랜덤 인형의 인기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선택한 가장 작고 안전한 모험인지도 모르겠다. 그 설렘이 소원 성취로 이어지길 또다시 주어진 설날에 기원해 본다. 국가도 사회도 개인의 구멍 난 주머니도 제발 넉넉해지기를.

TAGGED:문학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전문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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