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 공급 확대·기관투자자 규제 담은 주택법 발효 … 한인사회에 새로운 기회 될까

미국의 주택시장 판도를 바꿀 대규모 연방 주택개혁법이 지난 11일 발효됐다. 대통령의 서명은 없었지만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자동으로 법률이 됐고, 삼성전자 미주본사의 플레이노 이전과 맞물려 북텍사스 한인 부동산 시장에서도 벌써 그 여파가 감지되고 있다.
◈ 미국은 왜 ‘더 짓기’로 방향을 틀었나
미국의 집값 상승은 하루아침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건설업계가 장기간 침체를 겪으며 신규 주택 공급이 크게 줄었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목재·철강 등 자재비와 인건비까지 뛰면서 건설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반대로 수요는 계속 늘었다. 재택근무가 확산하면서 더 넓은 집을 찾는 사람이 늘었고, 텍사스·플로리다·애리조나처럼 기업 이전과 일자리 증가로 인구가 몰리는 남부 지역에서는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질렀다.
여기에 대형 투자회사들까지 단독주택 시장에 뛰어들어 수백~수천 채씩 사들여 임대사업을 확대하면서, 일반 가정은 현금을 앞세운 기관투자자와도 매물 경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첫 주택을 마련하려는 젊은 세대는 물론 자녀의 내 집 마련을 돕던 부모 세대까지 집을 구하기 어려워졌다는 불만이 쌓였다. 미국부동산협회(NAR)는 현재 미국에서 400만호 이상의 주택이 부족한 것으로 추산한다.
이런 진단에는 공화·민주 양당의 시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설 인허가 절차가 지나치게 느리고, 금융기관의 소액 대출·다가구주택 대출 여력이 부족하며, 대형 기관투자자의 매입이 일반 가정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이런 공감대를 바탕으로 마련된 것이 이번 법이다.
◈ 서명 없이 발효된 경위
‘21세기 ROAD 주택법(21st Century ROAD to Housing Act·H.R.6644)’은 지난달 22일 상원에서 85대 5, 다음 날 하원에서 358대 32라는 압도적 표차로 통과됐다. 법안은 지난달 29일 백악관에 전달됐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별도의 유권자 신분증 확인법을 먼저 처리하라며 서명식을 취소했다. 다만 미 헌법상 대통령이 법안을 받은 뒤 열흘(일요일 제외) 안에 서명도 거부권 행사도 하지 않으면 법안은 자동으로 법률이 되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 기간 아무 조치도 하지 않으면서 법안은 지난 11일 서명 없이 발효됐다.
의회가 계속 회기 중이어서 대통령이 법안을 돌려보낼 수 없는 이른바 ‘포켓 비토’도 성립하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이란제재법,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예루살렘대사관 이전법도 과거 같은 방식으로 법률이 된 전례가 있다.
◈ 법안 핵심 내용
법의 큰 방향은 정부가 집값을 직접 통제하거나 현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금융 절차의 문턱을 낮춰 공급을 늘리는 데 있다.
연방 환경심사를 간소화하고 지자체가 표준 주택설계를 미리 승인해 인허가 속도를 높이도록 지원하며, 실제로 주택 공급을 늘린 지자체에는 재정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대형 기관투자자의 단독주택 매입 제한이다. 시장 가격을 끌어올렸다는 비판을 받아온 대형 투자회사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취지지만, 새로 지어 임대하는 ‘빌드투렌트(build-to-rent)’ 단지는 예외로 뒀다. 즉각적인 집값 하락보다는 매입 증가세를 억제하는 수준으로 봐야 한다는 평가다.
주택금융 제도도 손질했다. 연방주택청(FHA)의 대출 제도를 현실에 맞게 고치고 모듈러·제조주택에 대한 금융 지원을 늘렸으며, 지역은행과 커뮤니티 금융기관이 주택 건설·모기지 시장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했다.
은행의 공공복지 투자 한도도 자산의 15%에서 20%로 늘려, 저렴한 주택사업에 자금을 대는 지역은행의 여력을 키웠다.
신규 주택은 토지 확보와 인허가, 착공을 거쳐 입주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만큼, 이번 법 역시 단기간에 집값을 떨어뜨리기보다 구조적인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장기적인 정책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 한인 동포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기관투자자의 단독주택 매입 제한은 첫 주택 구입을 준비하는 한인 가정에 특히 의미가 있다.
현금을 앞세운 대형 투자회사와 매물을 두고 경쟁해야 했던 상황이 다소 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녀의 첫 집 마련을 돕는 한인 부모들이나 갓 정착한 젊은 가정에게는 그만큼 부담이 줄어들 여지가 생긴 셈이다.
FHA 대출 문턱 완화와 지역은행의 대출 여력 확대도 자영업자 비중이 높은 한인사회에는 반가운 대목이다. 대출 상품을 고를 수 있는 금융기관의 선택지가 넓어질 수 있어서다. 다만 소득·신용 심사 기준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대출 승인 여부는 여전히 신청자의 소득과 크레딧, 담보가치에 달려 있다. 모듈러·제조주택 공급 확대는 은퇴를 준비하는 시니어층이나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주택을 찾는 가정에도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다만 법 시행과 동시에 다운페이먼트 보조금이 지급되거나 모기지 금리가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상원 은행위원회는 이 법이 재정중립적으로 설계됐으며, 법에 포함된 여러 시범사업도 각 부처의 세부 규정 마련과 의회의 별도 예산 배정을 거쳐야 실제로 시행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한인 동포들이 체감할 만한 변화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 북텍사스 부동산 시장
전국적인 정책 변화와 별개로, 삼성전자 미주본사가 뉴저지에서 플레이노로 이전한다고 발표하면서 북텍사스 한인 부동산 시장에는 이미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사이먼 윤 부동산 대표는 “삼성전자 미주본사의 플레이노 이전 발표 이후 삼성전자 직원들의 문의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전했다.
윤 대표는 “플레이노뿐 아니라 프리스코, 캐롤튼, 알렌 등 출퇴근이 편리하고 학군이 좋은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기업 이전이 본격화될수록 주거 수요도 함께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최근 시장 분위기에 대해서는 “금리 부담으로 거래량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실수요는 꾸준하다”며 “좋은 입지와 학군을 갖춘 매물은 여전히 빠르게 거래되고 있다”고 전했다.
북텍사스는 삼성전자 외에도 토요타 북미본사, JP모건체이스, 리버티뮤추얼 등 대기업이 이미 자리 잡거나 사업을 확대해 온 지역이다.
기업이 늘어날수록 일자리와 주택 수요도 함께 늘어나는 만큼, 공급이 뒤따르지 않으면 집값과 임대료는 다시 오를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새 주택법이 공급 확대와 투자자 규제에 방점을 찍은 시점에 삼성 이전까지 겹치면서, 플레이노·프리스코·캐롤튼 일대에서 법의 효과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날지 주목된다. 다만 법안 내 여러 프로그램이 시행 세칙 마련과 예산 배정을 거쳐야 하는 만큼, 한인 동포들이 체감할 만한 변화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 미국 주택정책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이번 법은 집값을 인위적으로 끌어내리려는 정책이 아니다.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하기보다 민간이 더 많은 주택을 공급하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과도한 기관투자자의 시장 영향력을 조정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높은 건축비와 모기지 금리, 지방정부의 용도지역 규제 등 풀어야 할 과제도 여전히 적지 않아 이 법 하나로 미국의 주택난이 곧바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미국 주택정책이 ‘공급 확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방향 전환에 나섰다는 점에서 이번 법의 의미는 작지 않다.
특히 북텍사스 한인사회는 전국적인 주택정책 변화와 기업 이전에 따른 지역 성장이라는 두 흐름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 앞으로 몇 년간 이 두 흐름이 어떻게 맞물릴지는 북텍사스 부동산 시장은 물론, 이곳에 정착해 살아가는 한인 동포들의 주거 환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집을 더 많이 짓는다고 집값이 하루아침에 내려가지는 않지만, 공급 부족이라는 근본 원인을 풀려는 첫걸음을 뗐다는 점에서 이번 연방 주택법은 미국 주택시장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유광진 기자 ⓒ KT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