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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사진이 건너온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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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5월 15, 2026 12: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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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시인, 수필가)

친정 언니가 우리 딸내미 편에 아버지가 쓰시던 신분증 지갑을 보내왔다. 투명창으로 아버지 사진이 붙은 주민등록증이 보였다. 그리웠던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았다. 2007년에 재발급 받은 거였다. 살아 계셨다면 91세가 되었을 사진 속 아버지는 머리카락이 까맣고 주름도 없고 동안이어서 72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젊은 모습이었다.

  지갑 속에는 검은 학생모에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과 정장을 차려 입은 선생님들이 계단 위에 서 있는 사진이 증명사진과 함께 들어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아버지 필체로 “운동경기가 끝나고. 단기 4290년 11월 3일 인천”이라고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당수부’라는 글자로 보아 손으로 하는 운동 종목이었던 듯하다. 명함만 한 흑백사진 속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아버지였다.

  언니보다 내가 아버지와 산 세월이 더 길었는데, 나는 왜 그 사진을 본 적이 없을까. 평생 지니고 계셨다는 건데, 대체 어디에 넣어 두셨던 걸까. 처음엔 교복 차림이라 중고등학교 시절 사진인 줄 알았다. 아버지가 평양고급학교에 다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기로 바꿔보니 1957년이었다. 1935년생이었던 아버지가 22살 때니 대학생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와 송몽규가 입었던 옷차림도 그런 교복이었다. 아버지의 유년 이야기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월남 후 엄마를 만나기 전까지 시간은 필름이 끊기듯 비어 있었다. 70여 년 전에 찍은 사진 한 장이 그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다. 한국에 살았던 아버지에게서 언니에게로 다시 내 딸의 손으로 마침내 미국에 사는 내게로 흘러와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

  내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사진은 채 열 장이 되지 않는다. 새엄마가 친엄마 사진을 모두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갖고 있는 사진은 내가 미국에 왔을 때, 이모들이 엄마 얼굴 보라고 챙겨 준 거다. 자상했던 아버지는 미국에 사는 처형과 처제에게도 우리들 사진을 보내셨다. 사진 뒷면에는 어김없이 아버지가 쓴 메모가 적혀 있었다. 이십 대의 아버지가 수영복 차림으로 어린 나를 안고 찍은 사진, 언니와 내 백일 사진, 돌 사진 그리고 엄마 아빠 언니와 내가 함께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도 그렇게 살아남았다. 추억을 돌려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가장의 얼굴이었는데 사진 속 아버지는 청춘이었다. 친구들과 운동하고, 공부하고, 웃고 떠들었을 한 청년의 시간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황해도 해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수양산이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고향 이야기를 하실 때면 금세 개구쟁이 시절로 돌아가곤 했다.

  “여름이면 해주 앞바다에서 동네 아이들과 발가벗고 물놀이를 했지. 망둥이들이 어린 고추를 톡톡 건드리곤 했어. 바닷물이 빠지면 게와 조개가 지천이었는데, 우리에겐 바다가 놀이터이자 밥상이었지. 겨울이면 꽁꽁 언 논두렁에서 아버지가 나무로 만들어준 썰매를 타고 솜바지가 젖도록 얼음 위를 지쳤어. 콩서리를 해서 불에 구워 먹는 걸 콩충태라고 하는데 참 재밌었지.” 나는 그런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다.

  전쟁은 한 소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아버지는 열 일곱 살에 부모 형제를 북에 두고 사촌 형과 38선을 넘어왔다. 쌀 석 되를 걸머지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던 말 속에서 두려운 밤과 낯선 길이 느껴졌다. 온몸에 보리쌀만 한 이가 기어 다녀도 어쩌지 못하고 방공호에 몸을 숨긴 채 폭탄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공포에 떨었던 아버지는 밤이면 수양산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스물다섯에 엄마를 만나 결혼했다. 인천은 제2의 고향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고향은 평생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느 해 아버지가 편지에 이런 말을 적어 보냈다.

  “아빠는 생이별하고 못 보는 지금이 제2의 6·25라고 생각한다. 이산가족의 아픔은 실향민만이 아는 일이다. 우린 삼팔선 없는 이산가족이다.” 북에 부모 형제를 두고 떠나와 평생 죄책감과 그리움에 시달렸던 아버지는 미국으로 떠난 딸 때문에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한국에 갔었다. 중환자실에서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뵈었다. 아버지가 지내시던 요양병원 이름은 ‘노인천국’이었다. 일인용 침대 옆 플라스틱 삼단 서랍장 위에는 나와 남편, 그리고 딸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그 사진을 매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흑백사진 속 검은 교복을 입은 청년은 훗날 ‘노인천국’이라는 이름의 유배지에서 생을 마치게 되리라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나 역시 몰랐다. 긴 세월이 흐른 뒤, 그 청년의 젊은 얼굴을 사진으로 다시 만나 이렇게 오래 울게 될 줄은. 사진은 멈춘 순간이 아니라, 세월 끝에 다시 도착한 한 사람의 생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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