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 육십을 넘기면 인생의 방정식이 제법 단순해질 줄 알았다. 청춘의 치기 어린 열정도, 중년의 치열했던 생존 경쟁도 한 자락 접어두고, 이제는 그저 물 흐르듯 평온하게 살아가면 그만인 줄 알았다. 세파에 깎이고 닳아 둥글어진 마음으로, 세상사 모든 소음에 일희일보기보다는 그저 먼 산 바라보듯 담담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 나이쯤 되면 배우자와 지치도록 부딪히는 뜨거운 관계보다, 그저 허물없는 친구처럼 편안하게 곁을 지키며 남은 생을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이상적인 삶의 형태라 확신했다. 격정의 계절을 지나 당도한 황혼의 계곡은 마땅히 고요하고 아늑해야 마땅하다고, 그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요즘 내 휴대폰은 뜬금없는 ‘연애 상담’으로 불이 난다. 사십 대도, 오십 대도 아닌, 환갑을 훌쩍 넘긴 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와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한다. “그 사람이 몇 시간째 전화를 안 받아”,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 것 같아” 하며 밤잠을 설친단다. 청춘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질투와 갈망, 설렘과 절망이 환갑을 넘긴 노년의 일상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 나이에 아직도 뜨겁게 ‘사랑’을 논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다가도 부러운 마음에 얼굴 붉어지는 이 노릇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나보다 한참 어린 동생들이 이런 일로 일상을 팽개치고 징징댔다면 당장 눈앞에 꿇어앉히고 “이 미련한 놈아, 나이 값 좀 해라, 정신 차려라”라며 호되게 야단을 쳤을지도 모른다. 먹고사는 일의 엄중함 앞에서 그깟 감정의 유희가 무슨 대수냐고 꿀밤을 먹였을 것이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목소리를 떨고 있는 이들은 험한 세상을 함께 버텨온 백전노장들이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단단한 이들이 사랑 앞에서는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린다. 나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한 채 그저 허허 웃으며 속으로 씁쓸한 침을 삼킬 뿐이다. 제삼자의 눈에는 그저 늦바람이거나 노년의 해프닝처럼 가볍게 보일지 몰라도, 정작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더없이 절실하고 애달프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남은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가장 뜨겁고, 가장 치열하며, 가장 잔인한 현실이기에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어줄 뿐 달리 방도가 없다.
그들의 사랑과 안타까운 의심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육십 평생을 살며 깨달은 삶의 노하우를 반추해 본다. 배우자든 연인이든, 누군가를 깊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의심은 밖으로 향하지 않고 속에서부터 까맣게 곪아 들어간다. 보이지 않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고, 상대의 사소한 눈빛 하나, 말투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를 고문하는 지옥이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를 무너뜨리기 전에 내 영혼과 삶 전체를 먼저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의심이 가진 치명적인 독성이다. 대체 사랑이 뭐길래, 인생의 황혼턱에 선 우리를 이토록 사정없이 흔들어 깨우고 피를 말리며 아프게 하는가.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 역시 이 나이가 되도록 사랑이 무엇인지 그 명쾌한 정답은 모르겠다. 젊은 날의 사랑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었다면, 지금의 사랑은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기를 걸어가는 사람으로서 확신하는 생활 철학은 하나 있다. 나이 듦이란 그동안 움켜쥐고 있던 손을 슬며시 펴고, 마음도 몸도 팽팽하게 조였던 모든 것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를 내 뜻대로 통제하겠다는 오만도, 세상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미련도 탕진하듯 버려야 한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움켜쥐는 것보다 놓아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시기다. 그런데 이 나이 되어서까지 마음의 실타래가 더 꼬이고 관계가 비틀어지기 시작하면, 남은 인생의 여정은 진짜 ‘캄캄하게’ 펼쳐질지도 모른다. 노년의 집착과 탐욕만큼 삶을 추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젊은 날의 집착은 패기라 부를 수 있을지 몰라도, 노년의 집착은 그저 지독한 형벌일 뿐이다.
나이 들어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 혹은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내 뜻대로 그 사람을 바꾸려 하지 않겠다는 침묵의 선언과도 같다. 친구에게는 정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밤새 누구를 만났고 왜 연락이 늦었냐며 취조하듯 캐묻지 않는다. 그저 오늘 건강하게 내 앞에 마주 앉아 따뜻한 찻잔을 기울여주는 것. 서로의 구부정한 등과 깊어진 주름을 묵묵히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고마울 뿐이다. 젊은 날의 사랑이 ‘너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소유하겠다’는 미숙한 오만이었다면, 노년의 사랑은 ‘네가 차마 말하지 못하는 슬픔과 깊은 외로움까지 그저 묵인하고 품어주겠다’는 바다 같은 너그러움이어야 하지 않을까.
육십 이후의 인생 로드맵은 ‘더 많이 소유하고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더 잘 덜어내고 안식하는 삶’이어야 한다. 마음에 매일같이 끼는 의심의 거품을 담담히 걷어내고, 타인을 내 손아귀에 쥐려는 집착의 끈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 나를 얽매던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며, 나를 둘러싼 인간과 자연과 조용히 조우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허락된 날까지 살다 가면 그게 바로 가장 행복하고 복된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생 후반전의 진짜 멋은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주변을 태워버릴 듯 타오르는 장작불이 아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은은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주위를 덥히는 숯불의 온기에 있다. 그러니 뜨겁지 않다고 슬퍼할 이유도, 내 마음 같지 않다고 괴로워할 이유도 없다. 이제 그만 미워하고, 그만 싸우고, 이 사람의 우문현답에 귀를 기울여보기를 바란다. 우리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은 더 가볍고, 더 담백하며, 마침내 완전하게 평온할 자격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