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우보이모자와 석유, 낮은 세금, 총, 그리고 공화당. 한국에서든 미국 다른 주에서든 ‘텍사스’ 하면 떠올리는 그림은 대개 비슷하다. 대표적인 ‘레드 스테이트’다. 텍사스에 산다고 하면 “거기는 원래 공화당 땅 아니냐”는 말이 먼저 돌아왔다.
11월 3일 밤, 그 공식이 깨졌다. 연방 상원의원과 주지사에 이어 부지사, 주법무장관까지 민주당 후보가 이겼다. 민주당이 텍사스 주 전체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1994년 이후 32년 만이다. 민주당 연방 상원의원이 텍사스에서 당선된 것도 1988년 로이드 벤슨(Lloyd Bentsen) 이후 처음이다.
◈ 늘 신기루였던 ‘블루 텍사스’
‘이번에는 텍사스를 파랗게 바꾸자’는 말은 선거철마다 나왔다. 2018년 베토 오로크(Beto O’Rourke)가 테드 크루즈(Ted Cruz) 상원의원을 3%포인트 안쪽까지 추격했을 때도 그랬다.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는 텍사스를 약 6%포인트 차로 지켰고, 2024년에는 그 격차를 14%포인트 가까이 벌렸다. 민주당의 기대는 번번이 신기루로 끝났다. 어느새 ‘블루 텍사스’라는 말은 희망이라기보다 선거철마다 나오는 농담처럼 들렸다.
2년 전 트럼프 대통령에게 두 자릿수 승리를 안겨준 텍사스가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했다. 공화당 텃밭이던 한인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콜린과 덴튼 카운티도 예외가 아니었다.
◈ 텍사스가 약속했던 것
사람들이 텍사스로 몰려온 이유는 분명했다. 저렴한 집값, 주 소득세가 없는 세금 제도, 풍부한 일자리였다. 한인들도 LA와 뉴욕을 떠나 달라스와 휴스턴에 새 터전을 잡았다. ‘텍사스에 가면 열심히 일한 만큼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텍사스에서 공화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니었다. 작은 정부와 낮은 세금, 개인의 자유와 책임, 총기 소유의 권리, 기독교 신앙과 전통적인 가족 가치가 곧 텍사스의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그 정치는 살림의 약속과 한 묶음이었다. 세금을 적게 걷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면 경제가 성장하고 주민들의 삶도 나아진다는 논리였다. 유권자들은 그 약속을 믿고 30년 넘게 같은 쪽에 표를 줬다.
그런데 그 약속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프리스코의 중위 월세는 2014년 1,222달러에서 2024년 2,200달러로 10년 새 약 80% 올랐다. AAA 텍사스는 올해 10월 휘발유값이 역대 10월 가운데 가장 비쌀 것으로 내다봤다. NBC 5 시청자 설문에서는 북텍사스 응답자 10명 중 6명 가까이가 근근이 버티거나 생활비가 버겁다고 답했다. 가장 큰 부담으로 꼽힌 것은 식료품비였다. 텍사스가 약속했던 번영과 주민들이 체감하는 현실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것이다.
◈ 경기는 호황, 개개인의 삶은 어려워져
경제지표는 늘 호황을 나타내지만 개개인의 삶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장을 보고 나면 카트는 가벼운데 영수증은 길다. 월급날이 지나면 통장은 금세 비고, 기름을 넣을 때마다 계산이 먼저 앞선다.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고픈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왜 나아지지 않느냐는 허기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1956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신익희 후보를 앞세워 내건 구호다. 70년 전 한국의 구호가 2026년 텍사스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CBS 방송 전국 조사에서는 유권자 89%가 생활비를 투표의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요인으로 꼽았다.
텍사스 유권자들은 이념을 바꾼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믿어온 정치적 약속과 팍팍해진 살림살이 사이에서 새로운 답을 찾았다.
◈ 텍사스는 텍사스다웠다
그렇다고 텍사스가 하루아침에 진보의 땅이 된 것은 아니다. 같은 선거에서 콜린과 덴튼 카운티 유권자들은 카운티 판사 자리를 공화당 현직에게 다시 맡겼다. 콜린 카운티가 내놓은 채권 발행안도 모두 부결됐다. 위쪽은 바꾸되, 동네 살림의 씀씀이는 단단히 묶어 둔 셈이다.
나는 이것이 가장 텍사스다운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의 별명은 ‘론스타(Lone Star)’, 외로운 별이다. 독립과 자율의 역사가 담긴 이름이다.
텍사스 유권자들은 어느 정당의 표밭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키면서도 정치적 변화를 요구할 수 있다.
◈ 별이 향할 다음 방향
텍사스가 파랗게 물들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왜 텍사스가 변화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이다.
공화당은 오랜 지지자들이 왜 등을 돌렸는지 돌아봐야 한다. 민주당은 이번에 받은 표가 영원한 지지가 아니라 변화에 대한 기대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당장의 숙제는 승자에게 있다. 지나 히노호사(Gina Hinojosa) 당선인은 1994년 앤 리처즈(Ann Richards) 전 주지사가 재선에 실패한 뒤 처음 나온 민주당 주지사가 된다. 주지사 한 사람이 바뀐다고 당장 월세가 내려가고 장바구니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32년 동안 한쪽을 믿었던 유권자들이 이번에 돌아섰다면, 앞으로 또 돌아서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들이 지켜볼 것은 정당의 이름이 아니라 내 살림이 나아졌느냐다.
‘살 만하다’는 것은 거창한 말이 아니다. 월세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밤이 줄어드는 것, 장바구니를 들 때 계산기부터 두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 주유소 앞에서 한숨부터 나오지 않는 것, 아이들 학교와 부모님의 병원비 걱정이 조금은 덜해지는 것이다.
텍사스의 별은 이번에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그 별이 앞으로도 같은 방향을 가리킬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결국 유권자들이 다시 물을 질문은 하나다.
“갈아보니, 살 만해졌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