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펠탑에 걸린 노을, 센강을 미끄러지는 유람선, 몽마르트 언덕에 흐르는 샹송, 샹젤리제 노천 카페의 커피 한 잔 — 프랑스라는 이름이 불러오는 낭만과 여유의 그림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얹자면 톨레랑스다. 1763년 볼테르가 『관용론』을 써서 종교적 광기에 맞섰던 나라, 나와 다른 것을 견디는 힘을 시민의 품격으로 여겨온 나라. 우리 세대에게 프랑스는 “잘사는 나라”이자 “교양 있는 나라”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 프랑스가 최루가스에 덮였다. 시작은 9월, 파리 근교의 한 고등학교였다. 아이들의 요구는 소박했다. 1년 내내 과학 선생님이 없었고 교과서도 없었다. 교실에 의자가 모자랐고 물이 샜다.
불과 몇 주 만에 시위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됐다. 복면 쓴 무리가 교문을 막고 쓰레기통에 불을 질렀다. 10월 17일에는 “노란 조끼”가 앞장선 물가 항의 시위에 55만 명이 쏟아져 나왔고, 밤이 되자 약탈과 방화가 벌어졌다. 명품 매장이 털렸다. 일주일 뒤 정부는 경찰 7만 명과 장갑차를 풀었고, 루브르를 비롯한 파리의 미술관들이 문을 닫았다.
관용의 나라에서 학생은 교장에게, 경찰은 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누군가는 이웃의 가게를 털었다. 143년 된 리모주 시청 건물이 성난 불길에 무너졌다.
이 불은 어디서 붙었는가.
프랑스의 한 가정을 보자. 할아버지는 예순 무렵 은퇴해 일할 때 소득의 70% 넘게 연금으로 받는다. 손자는 선생님 없는 교실에서 의자를 다툰다. 1975년에는 일하는 사람이 은퇴자보다 46% 더 벌었지만, 2016년에는 오히려 2% 덜 벌었다. 일하는 손자보다 쉬는 할아버지가 더 넉넉한 나라가 된 것이다.
돈의 흐름은 더 노골적이다. 로이터가 2026년 예산안을 분석해 보니, 교육 예산의 4분의 1이 넘는 돈이 교실이 아니라 퇴직 교사의 연금으로 들어간다. 지난 20여 년 동안 연금 지출은 늘고 교육 지출은 줄었다. 프랑스는 나랏빚이 GDP의 119%, GDP의 14%가 넘는 돈을 연금에 쓰는데, 미국의 두 배다.
1980년대에는 연금을 내는 사람 셋이 받는 사람 하나를 받쳤다. 지금은 1.7명이 한 명을 받친다. 연금을 붓는 사람은 줄고 타 가는 사람은 느는데, 먼저 탄 사람 몫은 줄일 수 없다. 모자란 돈은 나라가 메우는데 해마다 약 1,700억 달러, 국방 예산의 세 배다. 그 돈을 어디서 아꼈는가. 교사 자리와 학교 건물이다.
왜 정치는 연금 대신 학교를 건드릴까. 답은 투표함에 있다. 은퇴자는 투표에 열심이고, 고등학생에게는 표가 없다. 외상 장부의 첫 장은 1981년에 펼쳐졌다. 미테랑 대통령은 은퇴 연령을 65세에서 60세로 단숨에 낮췄다. 이보다 달콤한 선물은 없었고, 한번 준 선물은 되돌리기 어려웠다. 2023년 두 살을 올리려 하자 거리가 들끓었고, 정부는 후퇴했다. 계산서는 표 없는 아이들 앞으로 갔다.
물론, 연금은 평생 일한 대가이고, 프랑스 노인 빈곤율이 OECD 최저 수준인 것은 이 제도의 성과다. 문제는 연금이 아니라 셈법이다. 받기만 하고 값을 묻지 않은 반세기, 그것이 프랑스의 비극이다.
영국도 다르지 않다. 연금을 받는 할머니라면 지난 15년이 나쁘지 않았다. “트리플 락” 덕분에 기초연금은 물가를 크게 웃돌며 70% 넘게 올랐다. 같은 기간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거의 제자리였다.
독일에서는 2019년 이후 제조업 일자리 약 34만 개가 사라졌다. 여당의 젊은 의원들이 “1,000억 유로가 넘는 청구서를 왜 우리 세대가 내야 하느냐”고 반기를 들었다. 그래도 독일 연방 예산의 3분의 1이 연금 보조금으로 나간다.
이들의 병명은 같다. 생산은 줄어드는데 지출은 못 줄이고, 그 청구서는 표 없는 세대에게 넘기는 정치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고 했다. 프랑스는 그 씨앗을 먹었다. 교사 자리와 학교 건물과 청년의 내일을 오늘 써버렸다. 쌀을 채우지 않고 퍼내기만 하면 항아리는 바닥을 드러낸다. 바닥을 본 사람들의 분노는 설득이 아니라 파괴로 터진다.
대서양 이쪽은 어떤가. 미국 사회보장연금의 은퇴 기금은 2032년 말이면 바닥이 보이고, 그때부터는 약속한 연금의 78%밖에 줄 수 없다는 것이 올해 관리위원회의 전망이다. 표 없는 세대 앞으로 청구서를 미뤄 둔다는 점에서, 프랑스가 교실에서 꺼내 쓴 것과 미국이 미래에서 당겨 쓰는 것은 같은 장부다.
다만 미국에는 프랑스에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아직 씨앗에 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올해 빅테크 네 곳이 쏟아붓는 설비투자만 6,500억 달러, 텍사스 들판에 올라가는 데이터센터는 21세기의 공장이다. 올해 상반기 미국 성장의 상당 부분이 이 AI 투자에서 나왔다는 분석도 있다. 프랑스가 연금으로 미래를 먹는 동안, 미국은 그래도 내일의 생산을 심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그 투자는 몇몇 거대 기업에 쏠려 있고, 공적 장부의 연금 시계는 프랑스와 같은 방향으로 돈다. 미국이 흥하는 것은 미국인이 더 현명해서가 아니라, 아직 씨앗 쓰는 손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손이 멈추는 날, 미국도 유럽처럼 될 수 있다.
달라스 한인 사회를 일군 1세대를 떠올린다. 세탁소 다리미 앞에서, 뷰티서플라이 계산대 뒤에서 하루 열두 시간을 서 있던 그 손들은 오늘을 아껴 자녀의 내일에 심었다. 그 수확으로 자란 우리는 지금 무엇을 심을지보다 무엇을 받을지부터 셈하고 있지는 않은가.
필자부터 그렇다. 얼마 전 중간선거 조기투표에서 인프라 세금 인상안 앞에 한참을 망설였다. 받을 땐 더 받고 싶고 낼 땐 덜 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연금 받는 분들이 인상을 바라는 것도 자연스럽다. 다만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받을 것과 함께 치를 값도 계산해 보자.
공짜는 없다. 지금 내가 치르지 않은 값은 내 아이가 치른다. 다음 주 화요일 투표소 앞에서도, 가게의 내년 계획 앞에서도, 저녁 식탁에서도 물어보자. 이것은 항아리의 쌀을 퍼내는 일인가, 채우는 일인가.
누가 볼테르의 나라에 불을 질렀는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계산하지 않고 받아온 반세기의 외상이었다. 그 장부를 다음 세대에 넘기지 않을 때, 우리의 내일은 오늘 남겨둔 씨앗만큼 자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