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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고대진] 꽃구경 가자

KTN Online
Last updated: 4월 9, 2026 9: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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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진 작가

◈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고 대진>

                마당에 있는 석류나무에 빨간 초롱꽃들이 가득 피었다. 예년보다 일찍 시작한 봄이어서 그런지 꽃들이 나무에 가득하고 꽃꿀을 따려고 몰려오는 벌새들도 붕붕 아우성친다. 해마다 이맘때 피는 석류꽃을 보면 800년 전의 터키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 ‘봄에 과수원으로 오세요’가 떠오른다.

                봄밤에 과수원으로 오세요

                석류나무 꽃그늘 아래

                등불이 켜있고 포도주잔에는 포도주가 따라졌고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도 있어요

                당신이 아니 오시면 이런 것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만일 오신다면 이런 것들 또 무슨 소용이랍니까?

   이 시는 봄날 저녁 무렵 석류꽃 꽃 초롱이 빨갛게 피어난 과수원에서 연인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초대하는 시다. 석류나무 아래 등불이 켜져 있고 흐드러지게 빨갛게 핀 석류꽃들이 불빛을 받아 빛난다. 하얀 천으로 덮인 테이블 위에는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고 나는 혼자 앉아서 당신이 오길 기다린다. 만일 안 오면 어쩌나…. 생각하니 그 사람이 없이는 이 모든 준비가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만일 온다면 꽃이라든가 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당신이 꽃이고 당신이 술이어서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는데…, 라며 봄날의 사랑을 노래한다.

                마당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상을 차리고 포도주를 따라놓고 친구를 초대하면 올까? 나희덕 시인은 이런 초대에 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며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나희덕: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전문

목련 그늘이 좋다고 놀러 오라던 친구에게 겨울 어느 날이 되어서야 찾아간다. ‘나왔어’ 하며 문을 열지만, 하얀 목련 대신 마주한 건 하얀 조등(弔燈). 목련 그늘이 아니라 조등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밤새 목련 지는 소리’를 듣는다. 꽃구경도 때를 잘 만나야 하는 듯,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시간 나면 보자, 언제 한 번 밥 먹자, 바쁜 거 좀 끝나고 놀러 갈게, 하다 보면 꽃 대신 조등만 보고 울고 올 수가 있다.

      석류꽃이 필 무렵이면 내 고향에는 왕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꽃나무 아래로 날리는 꽃잎들은 펑펑 날리는 눈이 되고 꽃비가 되어 머리에 얼굴에 어깨에 쌓일 것이다. 이럴 때 생각나는 최정례 시인의 <꽃구경 가자시더니>.

                벚꽃나무 머리 풀어 구름에 얹고/ 귀를 아프게 여네요/ 하염없이 떠가네요

                부신 햇빛 속 벌떼들 아우성/ 내 귀 속이 다 타는 듯하네요

                꽃구경 가지 꽃구경 가자시더니/ 무슨 말씀이었던지/ 이제야 아네요

                세상의 그런 말씀들은 꽃나무 아래 서면

                모두 부신 헛말씀이 되는 줄도 이제야 아네요

                그 무슨 헛 말씀이라도 빌려/ 멀리 떠메어져 가고 싶은 사람들

                벚꽃나무 아래 서보네요

                지금 이 봄 어딘가에서/ 꽃구경 가자고 또 누군가를 조르실 당신

                여기 벚꽃나무 꽃잎들이 부서지게 웃으며/ 다 듣네요

                헛말씀 헛마음으로 듣네요/ 혼자 꽃나무 아래 꽃매나 맞으려네요

                달디단 쓰디쓴 그런 말씀/ 저기 구름이 떠메고 가네요

        이 시를 생각했는지 마누라가 꽃구경 가자고 졸랐다.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근무할 때였다. 근처 ‘워싱턴 디시’는 벚꽃으로 유명한데 이 유명한 벚꽃을 구경 가자고 조르는 마누라. 차로 두 시간 가면 되는 거리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당시는 조교수 시절 가르치는 일과 연구 과제에 바빠 꽃구경에 하루를 바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누라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같이 시간을 낼 수 있을 때는 3월 봄방학 때뿐이었다. 봄방학을 맞아 벼르던 벚꽃 구경하러 갔다. 두 시간을 운전하고 간 그곳에는 핀 꽃은 거의 없고 봉오리 한두 개만 맺혀있어 꽃 없는 벚꽃나무만 구경하다 왔다. 꽃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맞지 않았던 것.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를 떠올렸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돌아오는 길에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이 자꾸 들려왔고 작년에 피었던 벚나무 꽃잎들이 부서지게 웃는 소리도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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