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텃밭에 지난겨울 패티오 벽난로에 불을 때면서 생긴 재와 상수리나무 나뭇잎 등을 켜켜이 부어 거름을 잘한탓인지 이른 봄부터 상추며 쑥갓, 열무, 슬란초등이 제법 잘 자랐다. 상추는 두 가지 종류의 씨를 뿌렸는데, 잎이 부드럽고 쌉싸라한 맛이 나는 것이 아무래도 조선 상추인 것 같았다.
아무튼 봄 한철은 잎채소를 잘 가꾸어 먹었고, 애들이 꽃을 피울 무렵 호박이 열렸다. 그런데 처음 보는 호박이었다. 분명히 파머스 마켓에서 지키니와 노란 스콰시 모종을 사다 심었는데, 우주선처럼 생긴 호박이 열렸다. 이 호박은 옆은 옥색에 표면이 아주 매끄럽고 동글납작한 몸체에 물결 모양의 주름이 있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이름이 패티팬 스쿼시(pattypan squash)였다. 모양이 비행접시를 닮았다하여 Flying sqush 혹은 UFO 호박이라 불리운다고도 했다. 처음엔 신기하여 장식으로 두었다가. 나중에 올리브 오일에 볶아서 먹어보니, 식감도 괜찮았고 고소한 풍미가 났다. 알고 보니 이 품종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수천년 전부터 재배해 온 전통 있는 여름 호박 품종이었다. 그들은 이 호박을 어떻게 요리해 먹었을지 궁금하다.
그 외도 오이와 토마토, 고추, 가지, 오크라를 심었는데, 이번에 토마토는 새로운 방법으로, 화분에 거꾸로 매달아 심었다. 토마토 재배 전문가에 의하면 토마토는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영양분이 아래로 모아져서 더 잘자란다고 한다. 하지만 물을 줄 때마다 나는 왠지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것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이 열리지도 않았다. 어쨌든 요즘 세태는 모든 식물과 가축들이 오직 생산성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실험대상에 오르고, 유전자 조작을 당하고 있다. 거기에 나까지 동참한 기분이 드는데, 어쩐지 나는 지금도 토마토 화분을 바로 세우는데 주저하고 있다.
8월에 접어드니 한낮은 너무 뜨거워, 해뜨기 전이나 해질녘에 텃밭으로 간다. 이제 텃밭엔 남아있는 것들도 별로 없다. 오이, 호박은 줄기부터 모두 타버렸고. 오직 고추와 가지, 오크라(okra)만 남아있다. 사실 오크라는 예쁜 노란꽃을 보기 위해 심었는데, 꽃은 피지 않고 쓸데없이 열매만 주렁주렁 열렸다. 나는 속이 미끈미끈한 오크라 식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모두 이웃에게 나누어주었다. 너무 더운 탓인지 고추도 맵고 두꺼워졌다. 연일 100도가 넘는 날씨가 계속 되다보니, 사람이나 채소나 시들시들하다.
이 텃밭 옆에는 무화과나무와 서양배나무가 있다. 7월 말이면 무화과나무에서는 이미 달콤한 냄새가 난다. 나는 조석으로 텃밭에 나갈 때마다 무화과를 몇 개씩 따먹는 다. 사이즈가 크진 않지만 무척 달다. 나는 무화과를 먹을때마다 나희덕 시인의 시< 한 손에 무화과를 들고>를 떠올린다. 시인은 무화과를 보며 실타래 모양의 속꽃들, 붉게 곤두선 혀, 부르튼 입술, 뭉클뭉클 흘러드는 이 말, 같은 시어들을 끌어올리고 초가을 저녁에 이만한 향기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눈부신 열매들이란 좀 멀리 있는 편이 좋다‘고도 한다. 그렇다. 요즘 우리집은 이 눈부신 무화과와 서양배 때문에 온갖 야생동물과 새들이 몰려든다. 잘익은 무화과는 새들이 쪼아먹은 흔적이 역력하고, 하루에도 몇 개씩 후드득 떨어지는 배나무 밑엔 야생토끼와 거북이의 나들이가 잦다. 아마도 우리집 뒷마당이 과일 맛집으로 소문이 난 듯하다. 마치 야생 과일이 숲속 동물들에게 소중한 먹이를 제공하고, 씨앗을 멀리 퍼트려 숲의 생태계를 풍요롭게 하듯이, 지금 우리집 과일나무들도 열심히 텍사스 들판의 생태계를 돕고 있다.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말복도 지나고 여름은 서서히 마지막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 해마다 7,8월엔 여행을 떠났는데, 올해는 집에만 있었다. 더운 뉴스들이 바람에 실려오고, 폭염으로 세계의 도시들은 몸살을 앓고, 또 어디선가는 폭포수 같은 미담들이 간혹 쏟아졌다.
문득 우리는 태양의 봉쇄 아래서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이 든다. 단 한번, 2026년의 8월이 이렇게 또 지나간다. 불볕아래 가장 단단한 열매를 남기고, 수많은 이야기를 낳고…..꼬리가 긴 새 한 마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붉은 석양을 향하여 날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