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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낙원은 한 포기씩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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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7월 17, 2026 10: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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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 / 수필가

달라스의 우기는 5월이다. 하지만 올해는 6월에도 비가 많이 왔다. 몇 차례 비가 지나가면 메마르기만 하던 땅이 조금씩 숨을 쉰다. 잿빛이던 가지마다 연둣빛 새순이 돋고, 꽃들은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제 차례를 알고 피어난다. 자연은 누구의 재촉도 받지 않는다. 그저 자기 시간이 오면 묵묵히 제 일을 한다. 올해 그 계절에 나는 충동적인 결심을 하나 했다. 뒷마당 화단을 갈아엎기로 한 것이다. 십여 년 동안 숲처럼 자라던 나무와 꽃나무를 정리했다. 삽을 들고 흙을 뒤집는 동안 오래 보아 익숙했던 풍경도 함께 사라졌다. 나무가 떠난 자리에 햇빛이 깊숙이 내려앉았고, 바람은 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마당을 지나갔다.

무언가를 잃었다는 생각보다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들이 더 많았다. 살다 보면 채우는 일보다 비우는 일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우리는 늘 더 많은 것을 가지려 애쓰지만, 자연은 반대로 말하는 듯하다. 오래된 잎을 떨구어야 새잎이 나오고, 가지를 쳐내야 꽃이 많아지며, 빽빽한 숲보다 적당한 여백이 더 많은 생명을 품는다. 빈 마당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정원을 만들어 보자.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꽃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길가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던 꽃들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가는 곳마다 잘 다듬어진 화단만 눈에 들어왔다. 온통 나의 관심사는 화단 속 꽃들이었다. 붉은 꽃은 왜 저 더위를 견디는지, 노란 꽃은 왜 저토록 오래 피어 있는지 궁금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너서리를 찾아다니며 꽃을 배웠다. 처음에는 꽃의 이름을 외웠고, 다음에는 꽃의 성질을 배웠다. 어떤 꽃은 강한 햇볕을 좋아했고, 어떤 꽃은 메마른 흙을 견디며 더 오래 피었다. 비를 좋아하는 꽃도 있었지만, 비가 많으면 오히려 뿌리가 상하는 꽃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꽃을 보며 사람을 배우고 있었다. 꽃은 모두 아름다웠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우리의 모습도 그렇다. 누군가는 뜨거운 햇살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누군가는 잠시 그늘이 있어야 다시 일어선다. 누구에게나 같은 계절이 오지만,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은 아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내가 선택한 꽃들은 의외로 소박했다. 작은 돌틈에는 가시 없는 선인장을 심기로 했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 좋아서다. 란타나는 달라스의 뜨거운 여름을 가장 잘 견디는 꽃이다. 태양이 강할수록 더 오래 피어난다. 배롱나무는 한여름이 절정일 때 가장 화려한 꽃을 올린다. 모두가 더위에 지쳐 고개를 숙일 때 오히려 자신의 계절을 맞이한다. 멕시칸부시 세이지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보랏빛 물결을 만들고, 채송화는 아침 햇살을 받으면 환하게 웃다가 저녁이면 조용히 꽃잎을 접는다.

평범한 꽃들이다. 하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깨닫게 된다. 자연은 화려한 한 송이보다 서로 다른 생명들이 어우러질 때 더 아름답다는 것을. 높은 나무 하나만으로는 숲이 되지 않는다. 작은 풀과 꽃, 돌과 흙, 벌과 나비, 바람과 햇빛까지 함께 있어야 비로소 하나의 풍경이 완성된다. 결국 내 정원은 가장 평범한 꽃들로 채워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범한 꽃들이 모이자 풍경은 평범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앞에서 빛나고, 누군가는 뒤에서 받쳐 준다. 서로 다른 삶들이 제자리를 지킬 때 한 가정이 되고, 한 마을이 되고, 한 사회가 된다. 정원을 만들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기다림이었다. 꽃은 심는다고 바로 피지 않는다. 오늘은 뿌리를 내리고, 내일은 잎을 키우고, 계절이 무르익어야 비로소 꽃을 보여 준다. 우리는 결과를 먼저 보고 싶어 하지만, 자연은 언제나 과정을 먼저 살아낸다. 그래서 정원은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완성하는 예술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완성된 정원을 꿈꾸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꽃 한 포기. 내일은 작은 돌 하나. 다음에는 새가 쉬어 갈 물그릇 하나. 그렇게 하나씩 더해 갈 생각이다. 언젠가 이 작은 마당이 아름다운 정원이 된다면, 그것은 비싼 나무를 심었기 때문도, 희귀한 꽃을 모았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제때 피고, 제때 쉬고, 제때 기다리는 자연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닮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낙원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풍경이 아니다. 하루를 정성껏 살아낸 시간들이 한 겹씩 쌓여, 어느 날 문득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꽃을 심는다. 꽃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조급함을 덜어내고, 기다림을 배우고, 계절을 믿는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어쩌면 정원은 집 밖에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살아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먼저 자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작은 꽃 한 포기를 심는다. 그 한 송이가 언젠가 숲이 될 것을 믿어 본다. 그 마음이 이미 낙원의 시작이 아닐까.

TAGGED: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낙원문학문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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