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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숨통 트이다

Last updated: 3월 3, 2023 10: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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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바짝 말라 세상과 단절한 듯 보이던 무궁화 가지에 움이 트기 시작했다.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대체 봄기운을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자연의 조화가 참으로 신비롭다. 

며칠 전, 빈 가지에 조그만 새순이 여기저기 솟아오르더니 작은 잎새들이 앞다투어 얼굴을 내밀었다. 어느새 가지가 빼곡하다. 다투지 않고 그들만의 보폭을 유지하면서 봄을 맞는 모습이 조화롭다. 봄바람이 불 때마다 팔랑거리는 작은 잎새들이 마치 날갯짓하는 나비 같다. 하늘이 내리는 물과 빛으로 강인하게 견디며 살아내는 모습이 새삼 대견하다. 

 

날이 따뜻해져서 다시 호숫가를 걷기 시작했다. 그곳에도 봄이 한창이었다. 분수에서 뿜어내는 물줄기에 봄 햇살이 닿자 거짓말처럼 눈앞에 무지개가 생겼다. 힘들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해가 자리를 옮길 때까지 오래 서 있었다. 오리와 거북이가 돌아온 호수는 활기가 넘쳤다. 짝을 짓는 계절인지 오리들은 암수가 뒤뚱거리며 다정히 거닐기도 하고 바짝 붙어 앉아서 졸기도 했다. 거북이들이 잔디밭 위에 엎드려 넓은 등을 말리는 풍경만으로도 평화로워 보였다. 물가에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산책로에 있는 것보다 생기가 돌았다. 라일락도 그랬다. 물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무의 단면을 보면 빈틈이라곤 없고 꽉 막힌 듯 보이는데 대체 어디로, 무슨 힘으로 그렇게 물을 빨아올리며 살아남는 것일까. 식물도 사람의 혈관처럼 물이 오르는 통로에 찌꺼기가 쌓이거나 막히면 죽는 걸까. 호숫가를 돌며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얼마 전, 집에서 쓰는 정수기에 문제가 생겼다. 누수 문제로 세 번이나 서비스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았다. 미국 회사였다면 새 기계로 교체해주었을 텐데, 한국 회사는 사람을 보내 계속 고쳐주기만 했다. 고치고 난 후에도 얼마 안 가서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걸 보면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는 기계를 꺼버리면 되니 괜찮지만, 외출했을 때 물이 새면 마루나 가구가 젖어 문제가 커지지 않겠냐고 교체를 부탁했더니 자기 회사에 보험이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괴변만 늘어놓았다. 

불안불안하던 정수기가 결국 사고를 쳤다.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흘러나왔다. 전처럼 졸졸 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전원을 끄고 또다시 전화를 했다. 집에 아무도 없었다면 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마지못해 새 기계로 교체해주어 일단락되었으나 직원들의 대응과 태도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원인은 기계가 아니라 호수였다. 가느다란 호수에 석회질이 잔뜩 끼어 통로가 막히니 역류했던 거다. 사람이나 기계나 혈관이 막히면 정상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정수기를 못 쓸 때마다 마트에서 물을 사다 먹었다. 그중 2갤런짜리는 부엌 싱크대 위에 놓고 음식 할 때 사용했는데, 그 물통도 처음엔 잘 나오다가 어느 순간이 되니 졸졸거리며 나와서 불편했다. 원래 그런 건 줄 알고 물통을 기울여 따라 썼는데 어느 날 점자처럼 찍힌 글씨가 손가락에 느껴졌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용 전에 구멍을 뚫으라는 말이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찍혀있었다. 칼로 표시된 곳을 찔렀다. 체증이 내려가듯 트림을 하며 물이 시원하게 쏟아졌다. 물통에도 숨구멍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진즉에 뚫어 주었다면 무거운 물통을 들고 기울여 가며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관심이 없어서 물통과 소통하는 법을 몰랐다. 목욕탕에 샤워기도 같은 이유라는 걸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팔 년간 사용했던 샤워기도 꽉 막혀 속이 속이 아니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사람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근간 잘 통한다고 생각했던 지인과 소통에 문제가 생겼다. 돌아보니 소통이 되어서 잘 지냈던 게 아니라,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지인은 선을 넘기 시작했다. 감사는 없고 모든 걸 당연하다 여겼다. 일방적인 친절이나 배려는 상대를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소통의 통로가 막히면 관계는 소원해진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내 소화 기관에도 문제가 생겼다. 먹는 것마다 내려가지 못하고 역류했다. 오지게 속상했던 모양이다. 이용당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무거웠던 관계를 내려놓으니 숨통이 트였다.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무성해져야 시야에 들어오던 봄이 새롭게 다가왔다. 새봄은 초록이 아니라 연두였다. 나는 왜 봄이 모두 초록이라고 생각했을까. 늘 편견이 오류를 낳았다. 돌아오는 길에 민들레를 만났다. 가장 낮은 곳에서 봄을 제일 먼저 마중 나오는 변함없는 충직함에 감동하였다. 봄 햇살을 한껏 받은 연둣빛 잎새, 노란 민들레가 얼마나 싱그럽던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늘이 내린 물감은 사람이 만들어낸 물감보다 아름답다. 그가 지은 세상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망가져 간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안타깝고 두렵다. 이상기후, 천재지변, 전쟁 등으로 지구가 아프고 사람도 아프다. 흉흉한 뉴스는 가라앉고 좋은 소식만 움텄으면 좋겠다. 104년 전 오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내 나라에도, 우크라이나에도, 튀르키예에도,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땅에도 평화만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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