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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할머니의 삶이 시작되었다

Last updated: 8월 25, 2023 11: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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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많이 웃는다. 예전에는 그저 입만 벙긋하고 말던 별것 아닌 일에도 소리를 내 웃는다. 일요일 아침에 다니러 오겠다는 큰애의 소식에 며칠 전부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 설렘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생후 11주 만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러 손자가 온다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 사진이랑 동영상을 보내와 그걸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일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컴퓨터 창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며 하루를 보내는 게 요즘 나의 일상이다. 동영상에 옹알이하는 아기의 목소리라도 실려 오는 날에는 보고 또 보며 실실거리는 게 바보가 따로 없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말로만 듣던 할머니의 삶이 시작되고 만 것이었다. 

 

늦은 밤까지 미루었던 집 안 청소를 지치게 했는데도 밤새 잠을 설쳤다. 

아침 일찍부터 설쳐대는 남편 때문에 더는 누워 있을 수가 없어 따라 일어났다. 

어제 대문 앞 청소를 못 한 것이 생각나 일어나자 마자 대문 앞 청소부터 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아직 아이들이 도착할 시간이 안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대문 앞을 서성거리며 앞마당을 내다보는 게 꼭 예전의 내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어 코끝이 아려왔다.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약속한 대로 8시가 되자 자동차가 미끄러지듯 앞마당으로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문을 열고 달려 나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납신 것이다. 

어디에도 없던 손주를 품에 안았다. 아이의 품에 코를 묻고 아기 냄새를 들여 마신다. 

아, 이 냄새. 영원히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아련한 냄새. “사랑한다.” 자꾸 말하고 싶어지는 냄새. 가슴 밑바닥에 어둡게 가라앉은 감정들까지 훤히 밝혀 기어이 눈물을 쏟게 하는 냄새. 안 먹어도 배부르고 생각만 해도 든든해지는 냄새. 두려움마저 희석해 누구나 쌍권총을 찬 사람으로 만드는 신비한 냄새. 그랬다. 아이의 냄새는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임신 7개월이 되면서 한국에 남편을 두고 혼자 미국으로 들어와 큰애를 낳았다. 큰애는 생후 7개월이 되어서야 아빠와 첫 대면을 했다.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겼던 건지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너무 오랜만에 아기를 안아 보는지라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데 큰애가 익숙한 솜씨로 훈수를 두는 게 아닌가. 안는 폼이 어정쩡한 게 어색하다. 

두 아이를 키운 엄마답지 않게 긴장되어 진땀이 났다. 

나는 할머니라는 호칭에 벌써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 놀랐다. 내 속 어디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인지 정체 모를 억양으로 아기를 어르는 내 말투와 행동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예쁘다. 잠깐씩 마주치는 아이의 눈망울에 가슴이 뛰었다. 

꿈만 같다. 잠시도 쉬지 않고 날개짓하는 천사 같았다. 거의 30년 만에 안아보는 아기는 종일이라도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나의 첫 손주이니 말할 것도 없이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역사적인 순간은 아기가 오고 겨우 30분이 지나면서였다. 

나는 잘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기 전에 우유는 먹고 왔다고 하니 졸음이 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칭얼거리기 시작하던 아기는 고물거리던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저귀가 젖어 불편한가 싶어 안고 있던 아기를 내려놓고 기저귀를 갈다가 갑자기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머뭇거리자, 큰애가 나섰다. 숙련된 솜씨로 단숨에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아이를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그런 큰애를 보고 있자니 안쓰러워 나는 아기를 받아 안았다. 하지만, 뼈만 앙상한 내 품이 불편한지 울음은 더욱 거칠어지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남편은 아기가 병이라도 나면 어떡하느냐고 서둘러 돌아가는 게 낫겠다며 대문 앞에 사다 쌓아놓은 기저귀 박스들을 자동차 트렁크 안에 싣기 시작했다. 

나는 보내기 싫었다. 아기가 자는 사이 큰애와 지난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고 잠시라도 큰애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던 게 진짜 마음이었다. 남편 성화에 겨우 한 시간 만에 아이들을 보내고 난 참고 있던 울음을 끝내 터트리고 말았다. 

 

안 보던 사이에 큰애는 아빠가 되어 왔다. 저를 똑 닮은 사내아이를 보물처럼 품고 와 내게 안겨 주었다. 

그랬다. 큰애는 나의 보물이었다. 내 삶의 전부였고 이유였던 나의 분신, 내 아들은 이제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세상의 아버지들이 그렇듯 사랑을 모른다고 말하면서 무작정 사랑을 눈치채고 사랑의 묘약이라도 마신 듯 사랑에 빠져 진짠지 가짠지도 모르는 사랑을 진짜라고 믿으며 젊음을 다 탕진하고 만 그의 아버지처럼 꽃을 버리고 열매를 키우느라 등이 굽어가겠지. 

내가 그랬듯이 작은 그의 분신을 보물처럼 끌어안고 그 아련한 냄새에 힘을 얻어 쌍권총을 차고 세상을 견뎌 내겠지. 더는 나의 기쁨이고 또 나의 슬픔일 수만은 없다고 알려주고 간 것만 같아 또 눈물이 났다. 이제부터 그냥 주기만 하고 사랑만 하면 되는 할머니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인가. 

 

“나는 나에게 속삭인다. 어제의 나는 잊으라고. 화려하게 피워 올렸던 꽃은 떨어진 지 오래고 열매는 잘 익어 씨앗을 안았다고 그러니 품 넓은 조용한 그늘이 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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