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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엄마의기일에, 세대가이어지다

KTN Online
Last updated: 2월 27, 2026 2: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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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 / 수필가

엄마가 하늘나라로 주소를 옮긴 지 어느덧 아홉 해가 되었다. 시간은 참 무심하다. 처음 몇 해는 날짜가 다가오기만 해도 가슴이 먼저 알아차렸는데, 이제는 달력을 보며 “아, 벌써 그날이구나”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 그럼에도 기일은 여전히 우리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는 가장 단단한 약속이다.

  멀지 않은 곳에 계셔도 자주 찾아가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 엄마를 만난다. 정성껏 음식을 장만해 상을 차리고, 감사와 추모의 시간을 가진다. 올해는 설과 며칠 차이로 겹쳐 설에는 따로 모이지 않고 엄마 기일에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언제나처럼 큰오빠 집이다. 집안의 맏이인 오빠의 집은, 엄마가 떠난 뒤 자연스레 가족의 중심이 되었다.

  오후가 되면서 미안한 마음으로 큰올케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뭐하고 있냐는 내 질문에 언니는 웃음 섞인 소리로 며느리들의 티 타임 시간이라고 했다. 낮부터 세 올케들이 모여 부엌을 채웠을 것이다. 도마 위에서 채소 써는 소리, 기름에 전 부치는 소리, 그 사이를 오가는 수다. 그 수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는 반죽 같은 것이었으리라. “어머니가 이건 이렇게 하셨지.” “간은 조금 더 세게 하셨어.” 말끝마다 엄마가 붙어 있었을 것이다. 음식은 그렇게 완성되고, 상은 기억으로 차려진다.

  막내딸인 나는 늘 미안한 존재다. 일한다는 핑계로 손 하나 제대로 보태지 못하고, 상이 거의 완성될 무렵에야 도착하는 경우가 많다. 입만 들고 오는 사람이라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 말 뒤에는 늘 미묘한 죄책감이 따른다. 삶이라는 것이 늘 의지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지만, 그 변명은 스스로에게조차 충분하지 않다.

  올해는 조금 특별한 해였다. 엄마는 핏덩이였던 큰아이를 열 해 동안 키워주셨다. 맞벌이로 허둥대던 우리 대신, 엄마는 아이의 첫걸음을 지켜보고 첫 단어를 들었다. 학교 가는 길을 함께 걸었고, 아픈 밤에는 등을 두드리며 재웠다. 엄마의 품은 아이의 두 번째 집이었고, 첫 번째 세상이었으며 유년이었다. 그 아이가 장가를 가고, 이제는 제 아이를 안아 기일 자리에 섰다. 세월은 그렇게 조용히 한 세대를 건너 원을 그리듯 돌아온 순간이었다.

  두 살 반 된 증손자는 또래보다 눈빛이 깊었다. 또렷하고 영특한 눈으로 낯선 상차림과 어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아빠와 삼촌 사이에 끼어 서더니, 주변을 흘끗거리며 따라 절을 했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작은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면서도 끝까지 바닥에 이마를 붙이려 애쓰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엄숙해야 할 자리에 웃음이 번졌다. 늘 숙연함이 먼저였던 기일의 공기가 한순간 부드러워졌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떠난 이를 기리는 자리가 아니라, 이어진 생명을 확인하는 자리로 변해가는 순간이었다.

  영정 사진 속 엄마는 연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을 오래 바라보았다. 엄마는 늘 자식보다 손주를 더 귀히 여기셨다. 그 손주의 아이가 제 앞에 서서 서툰 절을 올리는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흐뭇해하셨을까. 사진 속 엄마의 표정은 마치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는 듯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아무 미련도 없다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면이 있었다. 우리 막내가 스스로 번 돈으로 처음 술을 사 왔다. 할머니께 드리는 첫 술이었다. 그 아이 역시 엄마 손에서 자랐다. 사람들은 막내를 두고 ‘할머니 껌딱지’라 불렀다. 아침저녁으로 보는 나보다도, 늘 할머니 곁에 붙어 다녔다. 잠도 할머니 옆에서 자려 했고, 작은 일에도 먼저 할머니를 찾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모습을 보며 서운한 적도 있었다.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는 것 같아 속이 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늘 곁에 있어주지 못한 내 자리의 빈틈을 엄마가 대신 채워주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죄스러웠다. 일이라는 이유로, 생계라는 이유로 아이와 나누지 못한 시간들이 내 안에 조용히 쌓여 있었다.

그랬던 막내가 어느새 자라, 제 손으로 술을 사 들고 섰다. 상 위에 조심스레 올려진 그 한 병의 술은 단순한 제물 이상의 의미였다. 그 안에는 어린 날의 기억과 할머니의 체온, 말없이 받았던 사랑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 술맛은 어땠을까. 막내의 마음에는 쓰디쓴 그리움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오래 묵은 고마움의 단맛이 스며 있었을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끝내 눈물을 삼켰다. 아이는 자라고, 엄마는 사진 속에 머물렀지만, 사랑은 그렇게 다른 자리로 옮겨가며 이어지고 있었다.

  기일은 떠난 이를 기억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남은 이들의 시간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해마다 그 상 앞에 서서 각자의 변화를 확인한다. 누군가는 부모가 되고, 누군가는 조부모가 된다. 아이였던 존재가 어른이 되어 술을 올리고, 어른이었던 우리는 어느새 부모의 나이를 넘어선다.

  엄마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없지만, 엄마로부터 시작된 사랑은 여전히 우리 사이를 흐르고 있다. 큰아이의 아이가 절을 하고, 막내가 술을 올리고, 올케들이 부엌에서 웃으며 음식을 만들고, 나는 미안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품은 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어쩌면 엄마는 진수성찬보다 이 장면을 더 기뻐하실 것이다. 흩어지지 않고 모여 있는 가족의 모습. 서로를 챙기며 이어지는 시간. 그 자체가 엄마가 평생 바라던 풍경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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