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15일, 달라스와 포트워스에서 제81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참석자들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앞에 고개를 숙였고, 기념식 마지막에는 태극기를 흔들며 힘차게 만세를 외쳤다.
해마다 보아온 풍경이었지만, 올해는 유독 한 가지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강단에 올라 광복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분들 대부분이 60~70대 이민 1세대였다는 점이다. 조국을 떠나 미국에 뿌리내리고 살아왔지만, 여전히 8월 15일이면 태극기 앞에 서서 선열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세대였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광복 100주년이 되는 2045년, 달라스와 포트워스의 광복절 기념식장에는 누가 앉아 있을까. 누가 기념사를 하고, 누가 자신의 자녀에게 “오늘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날”이라고 이야기해 줄까.
• “다음 세대”라는 말
실제로 올해 기념식에서 반복해서 나온 말 가운데 하나가 ‘다음 세대’였다. 우성철 달라스 한인회장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며,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트워스에서도 미국에 살고 있어도 우리의 뿌리는 대한민국이며, 역사와 문화, 한국인의 자긍심을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쩌면 올해 광복절 기념식에서 우리가 가장 귀담아들어야 할 말은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광복절은 단순히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통치가 끝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니다. 나라를 빼앗겼던 민족이 자유와 주권을 되찾은 날이다. 그 자유 뒤에는 자신의 삶과 재산, 때로는 가족의 안위까지 내놓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
특히 미주 한인들에게 광복절은 먼 고국의 역사만이 아니다. 이번 달라스 기념식에서도 초기 미주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과 미국 본토의 고된 삶 속에서도 독립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역사가 언급됐다. 자신의 삶조차 넉넉하지 않았던 이민자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돈을 모으고 마음을 모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광복정신은 무엇일까. 나라와 자유의 소중함을 아는 것,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몫을 감당하는 것, 어려움 속에서도 더 나은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이 받은 자유와 기회를 다음 사람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이 81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이어가야 할 광복정신이라고 생각한다.
• 다음 세대를 ‘관객’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면
그런 의미에서 광복정신의 계승은 매년 기념식을 여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만세삼창을 하는 전통도 소중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가 왜 우리가 태극기 앞에 서 있는지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한인 2세와 3세에게 광복은 이민 1세대와 같은 방식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아이들에게는 ‘광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역사의식이나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행사장에 따라오라고는 했지만 왜 그곳에 가야 하는지 설명했는가. 태극기를 손에 쥐여주면서 그 깃발을 지키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내놓았는지 들려주었는가.
광복정신을 계승하려면 다음 세대를 기념식의 ‘관객’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이번 달라스 기념식에서 열린 어린이·청소년 미술대회는 그런 의미에서 눈여겨볼 만했다. 아이들이 광복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를 생각해보는 것 역시 광복정신을 이어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앞으로는 한인 2세가 기념식의 사회를 보고, 청소년이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발표하고, 아이들이 자신에게 ‘자유’란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세대를 위해 영어로 광복의 역사를 설명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단순히 광복절 행사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광복절을 기념해야 하는 ‘이유’를 물려주는 것이다.
• 19년 뒤, 그 강단에 누가 서 있을까
광복 100주년은 먼 미래가 아니다. 2045년까지 이제 19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광복절 미술대회에 참가하는 초등학생들이 그때는 20대와 30대가 된다. 부모의 손을 잡고 행사장에 들어오는 아이들이 한인사회의 중심 세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 그들이 광복절 기념식의 강단에 올라 자신의 자녀에게 광복의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광복정신을 제대로 물려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8월 15일이 왜 중요한 날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성대한 기념식을 열어왔다 해도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셈이다.
그들이 한국어를 지금의 우리처럼 하지 못해도 괜찮다. 그래도 8월 15일이 되면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선조들이 자유를 잃었던 때가 있었고, 그 자유를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았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고.
광복정신은 기억 속에 보관할 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다음 사람에게 건네줄 때 살아남는다.
올해 광복절 기념식의 강단에 오른 이민 1세대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20년 뒤 그 강단을 생각했다. 그 자리가 비어 있지 않기를 바란다. 그 자리에 오늘 행사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던 아이가 서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아이가 또 다른 다음 세대에게 광복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소망한다.
선열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이 지켜낸 자유의 가치와 공동체를 향한 책임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 광복 100주년에도, 200주년에도 8월 15일의 의미가 살아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광복 81주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어가야 할 광복정신이며, 다음 세대에 남겨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