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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토끼 업은 기러기

Last updated: 9월 29, 2023 10: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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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언니가 오랜만에 가게에 들어섰다.

남편과 같이 살 때는 토요일 오후에 들르곤 했는데, 딸네 가족과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예상치 못한 시간에 불쑥 찾아온다. 가게에 와도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라이드해준 분 사정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언니는 운전을 못 한다. 

근처에서 샀다고 밑창이 두툼한 한국 슬리퍼를 보여주고는 여기는 뭐 좋은 거 없냐며 물건들을 뒤적거렸다. 

시간에 쫓기는지 손끝이 바빠 걸려있던 물건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몇 가지 물건을 산 뒤 평소처럼 앉아서 쉬지 못하고 간단히 안부만 나누고는 바쁘게 돌아섰다. 필요한 게 있어도 사러 오지 못하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서둘러 걸어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대도시 몇 곳을 제외하고는 운전을 안 해도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을 미국에선 찾기 어렵다. 자동차 운전은 보통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되고 부모로부터 자립하기 위한 필수코스지만, 사실 운전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다른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다. 공간 이동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시간을 바꿀 수 없지만, 공간은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미국 작가 프랭클린 P. 존스는 “시간은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며, 공간은 그 선물을 펼치는 장소이다.”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이라는 선물을 최대한 다양하게 누릴 수 있다면 왜 그것에 열광하지 않겠는가. 

내가 운전을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였다. 차를 몰고 처음 도로에 나섰던 날, 언니를 옆에 태우고 기세 좋게 출발했지만, 10분도 채 안 되어 가벼운 접촉 사고를 내고 말았다. 하필 왕초보 앞에 차 머리부터 들이밀며 무리하게 끼어들려던 아저씨가 재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직진 우선이잖아요. 당당하게 말했던 언니 덕에 아저씨는 더 이상 문제 삼지 못하고 물러났다. 접촉 사고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자매는 그대로 계속 직진했는데, 유턴하는 길을 찾지 못해 용산구에서 출발하여 서울역을 지나고 광화문까지 가서야 돌아오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날부터 좌충우돌했지만, 그 경험은 오히려 용기를 주었고 그 뒤로 운전에 재미가 붙어 여기저기 마구 돌아다녔다.

운전하며 느낀 것은 공포와 행복이었다. 핸들을 잡고 가속 페달을 밟으며 달리는 상황에서는 순간의 부주의만으로도 나와 다른 이가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이 코 앞 가까이에 있었다. 항상 안전거리를 유지하되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무리하지 말 것, 사고는 순간이니 절대 방심하지 말 것은 지금도 지키는 철칙이다. 반면, 이동의 자유가 가져다준 즐거움은 내 인생의 큰 기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버스와 기차로는 갈 수 없는 산길, 바닷가, 사찰에 갈 수 있게 되었고 가는 도중 예기치 않게 발견한 멋진 장소에서도 머물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시간은 마음대로 안 되었지만, 공간은 마음대로 되는 짜릿함이 운전의 공포를 압도적으로 이겼다. 

나에게 유목민의 피라도 흐르는 것인지, 도로에서 이정표를 볼 때면 그 목적지까지 달려가고 싶은 욕망을 종종 느낀다. 한국에서는 경부 고속도로에 들어설 때마다 그대로 부산까지 갔으면 했는데, 요새는 35번 고속도로에 오르면 오스틴까지 달리고 싶어진다. 

특히 미국은 자동차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 크다. 한국에선 계절 따라 달라지는 바다와 산을 보는 설렘이 있다면, 미국에선 주마다 다른 풍광과 문화를 발견할 수 있는 재미가 있다. 텍사스, 아칸소, 테네시, 조지아, 뉴멕시코, 유타, 뉴욕, 캘리포니아… 이곳들이 같은 나라인가 싶도록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미국에서 사는 것이 아주 좋아졌다. 세계를 한곳에 모아놓은 듯한 이 나라만 돌아다녀도 비행기 타고 멀리 가는 수고 없이 많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은가.

장거리 운전 자체도 즐겁다. 

주간 고속도로를 질주하거나 대형 트레일러를 앞질러 갈 때면 아드레날린이 나오는 듯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함이 나를 뒤흔들어 내가 살아 있음을, 그 생동감을 느낀다. 오토바이는 그 맛에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막히지 않고 시원하게 달리는 고속 도로에서는 명상 상태가 되기도 한다. 가슴은 차분하나 수많은 생각들이 오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자동차 스피커에서 좋아하는 노래라도 나오면 큰소리로 따라 부르곤 한다. 목청이 터지게 불러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동하려는 사람과 이동을 내켜 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뭘까. 아마도 집토끼와 기러기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곳에서 평온하게 사는 삶이 주는 행복이 크다. 집보다 더 나은 곳이 없다는 말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가끔은 산 너머 시베리아까지 가고 오는 기러기로 살고 싶다. 

날개를 펼쳐 멀리 나는 것이 고달프고 때론 낯선 곳에 들어서는 것이 망설여져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운전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는 여러 사정으로 운전을 못 하게 된 분이 많이 있다. 나와 같은 마음이지만, 운전을 못 하게 되어 발이 묶이게 된 이웃이 있는지 돌아봐야겠다. 언젠간 중고 RV라도 사서 친구와 같이 미대륙을 누비고 싶다. 

가끔은 집토끼를 등에 업고 날아가는 기러기가 되어보는 것도 보람 있을 것 같다. 

 

백경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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