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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눈의 언어

Last updated: 1월 15, 2021 9: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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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린다. 서설瑞雪이다. 아침 일찍 눈을 뜨면서부터 기다리던 눈이 오후가 다 되어서야 함박눈으로 찾아왔다. 정초에 내리는 눈을 서설이라고 한다. 정초라고 하기에는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텍사스에 내리는 함박눈이고 보면 상서로운 서설임에 틀림없다. 코비드 19로 우울하고 잔인했던 한해를 잘 견디었다고 하늘이 내리는 선물인가 보다. 힘들었던 모든 것들을 하얗게 지우고 새해 새 마음으로 새로 시작하라는 하늘의 깊고 너른 마음인 것 같다. 아프지 않게 몸과 마음을 잘 보살폈으니 기꺼이 오늘을 즐겨도 될 것 같다. 

 

 한참을 우리 네 식구는 창 앞에 서서, 밖을 들락거리며 함박눈 내리는 광경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아 놓느라 분주했다. 다 식은 브런치를 먹으면서도 내내 즐거웠다. 큰아이는 내일 캠핑을 하러 가서 하기로 했던 프러포즈를 당장 해야겠다며 여자 친구한테 예쁘게 준비하고 있으라고 문자를 보내놓고 법석을 떤다. 그래, 좋을 때다. 마음껏 즐겨라. 제일 좋을 때다. 인생의 황금기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날이 있으랴.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세팅을 맡겼던 반지를 어제 오후에 찾아다 주었으니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팬데믹으로 인해 줌으로 상견례를 하고 바로 결혼 날짜가 잡히는 바람에 큰아이는 제대로 프러포즈할 기회도 없었다. 남편은 결혼 날짜까지 잡아 놓고 하는 프러포즈인 만큼 좀 달라야 하지 않느냐며 어떻게 할 것인지 아이에게 짓궂게 묻는다. 무슨 말을 준비했냐고 나도 덩달아 아이에게 묻다가 남편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나는 가끔 프러포즈를 받기는 한 건지 의심이 가곤 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가 있느냐며 통박을 주는 거로 얼버무렸지만, 정말 기억이 없다. 그래서 오늘은 꼬치꼬치 따져 묻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눈에 대한 따뜻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인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연애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눈 오는 날만큼은 꺼내 놓을 가슴 뛰는, 혹은 가슴 아픈 사연은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젊은 날의 일탈이었지만, 여전히 가슴이 아린 것을 보면 치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대책 없이 무작정 떠오른다. 그날도 눈이 펑펑 내렸었다. 미리 가방을 싸서 마당 가에 쌓아 놓은 볏짚 틈에 숨겨 놓았다. 아무도 모르게 버스를 타고 무작정 수덕사로 향했다. 초행길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서둘렀을 텐데 수덕사에 있는 여승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숨어서 기웃거리었던 것까지는 생각이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나는 것은 수원에서 대학을 다니던 친구의 자취방에 앓아누워 있었던 것.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는 기억이 없다.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없어진 나를 찾아 걸려온 큰오빠의 전화를 받던 친구의 모습과 집으로 내려와 식음을 전폐하고 사투를 벌이든 나를 바라보든 엄마의 눈은 잊히지 않는다. 왜 그랬느냐고 단 한 번도 따져 묻지 않던 슬픈 눈. 허벅지까지 빠지는 산골을 헤매다 돌아오던 나를 묵묵히 바라보던 그 눈. 엄마가 돌아가시기 이태 전이었던가.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려 학교나 공공기관이 모두 문을 닫는 일명 “스노우 데이”였다. 나른한 오후, 창가에 앉아 엄마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이 나왔다. “꼭 너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어.” 그래서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노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노라며 진물을 훔치시던 그 눈이 그리워 눈발에 눈을 돌린다. 

 

눈발이 잦아들고 있다. 머지않아 그칠 것만 같은데 우리 큰아이는 지금 어쩌고 있을까. 프러포즈는 했을까. 목도리까지 매어주며 멋지게 하고 오라고 배웅까지 했는데 제대로 했을까. 괜히 비디오까지 찍으라고 했나 보다. 그것 찍겠다고 수선을 떨다가 망친 건 아니겠지. 어찌 됐든 눈 내리는 공원 숲길을 걸으며 추억은 만들고 있을 것이니 그거면 되었다. 먼 훗날, 눈 오는 날이라도 찾아와 줄 그런 추억이라면 괜찮다. 아내와 함께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추억이라면 더더욱 좋다. 나는 기억에도 없는 프러포즈를 남편은 얘기한다. 내가 기억을 못 한다고 꾸며대는 거 아니냐고 억지를 부려본다. 정확하게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은 나지 않는다면서, 그래도 사랑해서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추억도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누렇게 퇴색되다가 삭아가는가 보다. 프러포즈를 받은 지도 33년이 지났다. 찍어 놓은 비디오도 사진도 없으니 증명할 길이 없다. 오래된 기억은 편집이 가능하니 남은 날을 위해 이제라도 행복한 추억으로 재편집을 해야겠다.

 

 나이와 상관없이 눈 오는 날은 온 세상이 별천지가 되나 보다.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스틴에는 눈이 많이 쌓였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눈만 보면 좋은가 보다. 아마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 밖에 나와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는 것을 보니 어릴 적 생각이 나는가 보다. 오늘은 얼마나 많은 추억이 소환되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추억이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태어나고 있을까. 눈에 갇혀 그 눈에 발목이 잡혀 꿈을 꾸기 시작한 사람도 있을 테고, 또 그 꿈으로 용기를 얻고 길을 나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첫눈이 내리는 날에는 얼어있던 추억들이 눈발로 흩날린다. 깨끗하고 부드러운 영혼 같은 눈이 어디서부터 내려오는 것인지, 잊고 있던 추억들이 맨발로 뛰어내려 메마른 가슴팍에 내려앉는다.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잠시라도 맑고 선량하고 고요해진다. 

 

 목격전수目擊傳授라는 말이 있다. 입 벌려 말하지 않아도 눈끼리 마주칠 때 전해진다는 뜻이다. 눈맞춤이다. 비록 한나절이면 눈물이 되어 흐르고 말겠지만, 겨울이 되면 하얗고 따스한 영혼과 눈맞춤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눈, 눈에 갇혔네

함박눈도 싸라기눈도 아닌

그 눈에 갇혔네

 

눈을 뜰 수 없이 온통

하얗기만 한 눈부신 세상에는

길이 없어

그 아무 데도 갈 일이 없네

 

이대로 바라보고 있으면

발목부터 녹아 버리는 몸

눈, 그 눈 속에 갇혀

하얘진 삶으로 살고 싶네

 

김미희, (그 눈) 전문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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