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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꽃밭에서

Last updated: 3월 19, 2021 9: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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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그치고 나니 앞집 두 그루 돌배나무가 환하게 웃고 있다. 아직도 겨울잠을 자느냐고 묻는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오른다. 전에 없던 봄이라도 맞은 듯 설레는 아침이다.

‘스크루지 나무’가 생각이나 대문을 열고 나갔다. 나보다 더 게으른 나무도 있다고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캄캄하게 서 있을 거라고 으스대고 싶었다.

‘스크루지 나무’는 옆집 단풍나무다. 단풍이 들면 잎이 떨어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련만 새잎이 올라올 때까지 한 잎도 떨구지 않고 있는 것이 희한하기도 하고 구두쇠 같기도 해서 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단풍나무도 어느새 묵은 잎을 털어내고 새싹을 밀어내느라 분주했다. 힘껏 팔을 벌려 기지개를 켰다. 코비드 백신 공급이 활발해지면서 막혔던 물꼬가 터진 듯 팬데믹으로 꽁꽁 얼어있던 지구촌에 드디어 봄의 기운이 돌고 있다. 

나무들은 연둣빛 기억을 더듬거리고 태양은 우듬지부터 사랑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막 내민 순마다 낯빛에 윤기가 흐른다. 오늘은 하고 싶은 일이 많다. 봄 단장을 해야겠다. 

 

큰아이가 부른다. 브런치 준비를 다 마쳤나 보다. 결혼식 날을 잡은 후부터는 주일 브런치는 큰아이가 도맡아서 준비한다. 결혼하면 자주 와서 해줄 수 없으니 있는 날까지 맛있는 거 많이 해주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모양이다. 오늘의 메뉴는 무엇일까 기다리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날을 잡아 놓으니 시간이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집안에 들어서니 바다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다. 봉골레 파스타를 한 입 물고 나니 울컥이란 놈이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우리 네 식구가 함께하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돈다. 

“엄마, 또 울어?” 아이들이 놀려 댄다.  “그래, 엄마가 울보가 되어가는구나.” 

 

꽃밭을 만들기로 했다. 무엇부터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일단 마트에 가서 꽃씨부터 골라 오기로 했다. 제일 먼저 시금치, 상추, 파슬리, 고추, 오이, 호박씨 등이 눈에 들어와 카트에 실었다. 

어디에 어떻게 심을 것인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데이지, 달리아, 채송화, 접시꽃, 패랭이꽃, 백일홍, 샐비어 등 이것저것 집고 보니 12봉지나 되었다.

어느 꽃이 쉽게 싹을 틔울지 모르니 되는 대로 심어보기로 했다. 분홍빛 카네이션 화분 몇 개와 빨간색 만데빌라 화분 네 개도 챙겼다. 마지막으로 거름흙 몇 봉지와 비료를 싣고 나니 가슴 가득 붉은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큰길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오리 가족이 봄나들이를 하러 가는지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앞서가는 엄마 오리를 따라 새끼 오리 여섯 마리가 나란히 줄을 이었고 그 뒤로 아빠 오리가 뒤뚱뒤뚱 길을 건너고 있었다. 

먼저 길을 건넌 엄마 오리는 뒤처진 새끼는 없는지 확인이라도 하는지 길게 목을 빼고 갔던 길을 거슬러 올라왔다. 금줄(禁绳)이라도 내 걸은 듯 지나던 차들은 서서 오리 가족이 지나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보이지 않는 줄. 보이지 않아서 더 질긴 줄. 서로가 줄이고 길이 되어주는 저 줄.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어 줄 앞에서 줄 뒤에서 한 줄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오늘까지 달려왔지만 제대로 줄이 되고 길이 되어주었는지 그저 아쉬움뿐이다. 

이제 큰아이가, 나의 금줄(金ㅡ줄)이 이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 그만의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집을 나설 것이다. 나는 또 얼마나 나의 금줄(金ㅡ줄)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것인가. 

 

앞마당에 들어서니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뒤란 담장 앞으로 만데빌라를 심기로 했다. 다행히 봄비가 내린 뒤여서 땅은 부드러웠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 번도 직접 심어본 적이 없어 자신은 없다. 하지만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법. 일단 아이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사 온 거름흙을 넣고 비료를 한 줌 섞은 다음 만데빌라를 심었다. 나란히 네 개를 심어놓으니 제법 근사하다. 

옆에 있는 큰 목련 나무 그늘이 걱정되긴 하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벌써 풀이 무성하게 올라온 오른쪽 화단을 일궈 꽃씨를 뿌리기로 했다. 큰아이가 곡괭이로 땅을 파면 나는 풀을 골라냈다.

남편이 거름흙을 섞어 땅을 고르게 일구고 나면 작은 아이가 꽃씨를 뿌렸다. 골고루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비료를 살살 뿌렸다.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물뿌리개로 물을 흠뻑 주고 나니 해가 저물었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과연 고운 꽃이 올까. 고운 꽃을 기다리며 나는 또 이 노래를 얼마나 많이 부를까. 나는 그동안 아름다운 꽃밭을 일구긴 했던 걸까 생각해 본다. 그리움이 짙을수록 나무는 그늘을 더욱 더 키우고 해가 있는 쪽으로 가지를 튼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향기 가득 담아 꽃을 피운다. 순풍이기만 할 것 같은 봄바람에도 변주곡은 있고 캄캄할 것만 같은 그림자에도 빈칸은 있다. 

꽃밭에 앉아 그리움을 다독이고 계절 익히는 법을 배운다면 자음만으로도 행간을 촘촘히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봄이다.

 

오리 새끼들이 길 건너는 법 / 김미희

 

보기만 해도 완성되는 문장이 있다

 

오리가족이 행길을 건너고 있다

하필이면 러쉬아워(rush hour)인데

아랑곳없이 줄지어 가고 있다

 

줄 따라 오가던 차들이 일제히 멈추며

같은 문장을 떠올린다

 

내 안에 있는 나보다 먼저 있었던

대를 이어온

보이지 않아서 더욱 질긴 줄

 

엄마는 줄 머리에서

아빠는 줄 끝자락을 지키는 완성된 문장으로

 

가난한 집 사립문에도 높이 금줄(禁绳)로 내걸리고

사람들은 그때부터 마음에 담아온

뒤뚱뒤뚱 헤쳐나갈 금줄(金ㅡ줄)을 꺼내 새김질한다

 

아, 나의 금줄이 아직 길을 건너고 있구나

애써 참아 온 울음 줄도 가슴에 똬리를 친다

 

서로가 줄이고 길이 되는 이 줄을 본다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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