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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사이, 그 따뜻한 이름의 계절

Last updated: 5월 17, 2025 5: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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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 되면 눈이 자주 붓는다. 별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눈물이 잦아진다. 안 좋은 일 때문은 아니다. 생일이 가까워지면서 그리운 얼굴들이 불쑥불쑥 떠오르기 때문이다. 특히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에, 드라마 속 한 줄 대사에, 문득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상하다. 한 살씩 더 먹을수록 무뎌지기 마련일 텐데, 오히려 감정은 더 말랑해지고 연약해지는 것 같다.


  올해는 내 생일과 마더스 데이가 같은 날이다. 한 달에 특별한 날이 두 번이나 있어 매년 식구들에게 괜히 미안했는데, 이번에는 하루에 함께 맞이하게 되어 조금은 덜 미안해도 될 것 같아 다행이다. 게다가 두 해 전부터 오월은 더 각별해졌다. 첫 손자가 나와 같은 띠, 같은 오월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생일이라는 한 줄의 공통점이 우리 사이를 더욱 단단히 이어주는 듯하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엄마가 떠난 뒤로는 큰올케 언니가 매년 내 생일을 챙겨준다. 꼭 언니의 몫이 된 듯, 해마다 잊지 않고 챙긴다. 아직도 음력 생일을 고집하는 나를 미리 챙겨주는 사람은 언니와 큰오빠뿐이다. 저녁이나 함께 하자고 한다. 손자가 아직 어려 식당보다는 집이 낫겠다며 집으로 오라고 했다. 흔쾌히 승낙했다. 오빠네 아이들, 그러니까 조카들은 모두 한국에 살기에, 특별한 날이라도 되면 나도 언니 오빠에게 마음이 쓰인다. 오빠와 언니만이라도 초대하고 싶던 참이었는데 언니는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한발 먼저 마음을 전해왔다.


  남편과 막내아이는 아침을 차려준 뒤 장을 보러 나갔다. 조용한 집에 혼자 남으니 엄마 생각이 더 짙어진다. 커피잔을 들고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하시던 엄마의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전날 밤, 장미꽃다발을 들고 엄마 묘소에 다녀온 뒤 하루를 보내자고 다짐했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까맣게 잊어버렸다. 손자가 오는 날이면 늘 그렇다. 일상의 순서가 바뀌고 마음은 분주하다. 아이가 떠나고 나면 나는 녹초가 되어 눕는다.


  오늘도 손자는 서너 시쯤 오겠다고 했는데,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다. 일요일마다 12시까지 침대에 뒹굴던 나는 어디 가고 없다. 수북이 쌓인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묵은 먼지를 털고, 늘어진 것들을 정리하는 내가 있다. 부지런한 나, 손자를 기다리는 마냥 행복한 내가 있다.


  눈뜨면 나갔다가 눈 감으러 돌아오는 삶을 살다 보니, 정작 우리집 뒤란 텃밭에 뭐가 자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남편은 말없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상추, 쑥갓, 깻잎, 적갓, 미나리, 고추, 파까지. 없는 게 없다. 여름 내내 싱싱한 걸 먹게 해주겠다는 말이 그냥 던진 말이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남편은 가족을 위해 마른 땅에 씨를 뿌리고 날마다 물을 주며 텃밭을 키워왔다.


  여전히 내 삶은 콩닥거리며 날아다녀야 하는 것 같다. 날개 없는 인생이라면 마음에라도 날개를 달아야 한다. 아무리 채워도 마음속 어딘가는 늘 허공 같고, 허방 같고, 텅 빈 공터처럼 남아 있다. 은행 잔고처럼 자꾸 바닥을 드러내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엔 간절함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감정들을 나누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한 달 사이 손자는 부쩍 자랐다. 또렷한 호칭에 또렷한 문장,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한다. 목소리엔 힘이 실리고, 눈빛은 야무지다. 한 아이의 성장이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질 줄 몰랐다.


  모든 것은 ‘사이’에서 태어난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사이를 채우는 일이다. 그 사이엔 나 혼자가 아닌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있다. 함께라는 말, 그 안에는 다가가려는 설렘도, 남으려는 애틋함도 있다. 끼어들 수 있는 여백이 있다. 생각을 여밀 수 있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품도 담겨 있다. 안도 할 수 있는 자리도 따뜻한 저녁나절의 풍경도 있다. 하지만, 어둠으로 이어지는 길도 있다. 눈물 훔치게 하는 오해도 있고, 가슴을 헐게 하는 아픔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사이를 지나며 우리는 살아간다.


  나무도 계절을 건너며 많은 것을 겪는다. 푸르기만 한 계절은 없다. 하늘로 치솟던 열정을 뿌리로 모아 겨울을 버티고, 그 사이 생긴 나이테는 아무도 모르게 나이 들어간다는 증표가 된다. 어느새 바람은 계절을 물어 나르고, 하늘 가까이 자란 나무들은 빈 가지마다 초록 점을 찍으며 향기를 바른다.


  살아온 날들이 그러했듯, 살아가야 할 날들이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날개가 없어서 날지 못한 게 아니라, 날 수 없다고 믿었기에 날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늘 같은 날엔 하트 모양의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따뜻한 미역국을 나누며, 풍선을 불어 마음에 날개를 달아 띄워보면 된다. 그렇게, 살포시 ‘사이’를 건너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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