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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고대진] 3월의 눈

Last updated: 6월 21, 2024 4: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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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몇 년 전 3월 콜로라도의 산간 도시 볼더(Boulder)에 머물렀을 때다. 아침결에 조금씩 내리던 눈발이 오후 무렵이 되면서 천지를 휩싸며 내렸다. 펑펑 내리는 눈송이들은 바람을 타고 허공을 휘휘 돌면서 춤을 추고 있다. 땅에 안착하지 못하고 공중을 떠도는 것이 마치 살아있어 나는 것 같다. 마치 허공을 향해 내뱉는 말소리 같다. 김수영 시인은 <눈>을 떠올린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지기 전 춤추던 눈이 떨어진 뒤에도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단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참았던 기침을 마음껏 하라고 살아있는 눈 위에 마음껏 하고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으라고 한다. 끓어오르는 가래조차 삼켜야 했던 어두운 시절이었던 모양이다. 

 왜 시를 쓰냐고 혹은 왜 시를 읽느냐고 물으면 나는 사실 할 말이 없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내가 시를 쓰는 이유를 모르겠다. 굳이 대답하자면 그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난 또 하나의 꿈 꾸는 세계를 만들고 싶은 욕망? 두 세계가 부딪혀서 만드는 긴장이 시를 만든다. 시를 읽는 것도 그렇다. 좋은 시는 내가 절 좋아하는 만큼 내게 상처와 어둠을 견딜 수 있는 세계를 보게 해주며 생각과 마음을 정돈 시켜주고 삶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 시를 통해 보는 세상은 더 넓고 더 아름답고 때로는 아프기도 하다. 내가 못 보던,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런 세상을 보기도 한다. 밤새 내리는 눈을 보면서 황 동규 시인의 시 <한밤으로>를 읽어본다. 

우리 헤어질 땐/ 서로 가는 곳을 말하지 말자./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그걸 노래부를 힘만을.// 

눈이 왔다. 열한시/ 펑펑 눈이 왔다. 열한시.//

창밖에는 상록수들 눈에 덮이고/ 무엇보다도 희고 아름다운 밤/ 

거기에 내 검은 머리를 들이밀리.// 눈이 왔다. 열두시/ 눈이 왔다. 모든 소리들 입다물었다. 열두시.// 너의 일생에 이처럼 고요한 헤어짐이 있었나 보라/ 자물쇠 소리를 내지 말아라/ 열어두자 이 고요 속에 우리의 헤어짐을.// 한시/ 어디 돌이킬 수 없는 길 가는 청춘을 낭비할 만큼 부유한 자 있으리오/ 어디 이 청춘의 한 모퉁이를 종종걸음칠 만큼 가난한 자 있으리오/ 조용하다 지금 모든 것은.// 두시 두시// 말해보라 무엇인가 무엇인가 되고 싶은 너를./ 밤새 오는 눈. 그것을 맞는 길/ 그리고 등을 잡고 섰는 나/ 말해보라 무엇인가 새로 되고 싶은 너를.// 이 헤어짐이 우리를 저 다른 바깥/ 저 단단한 떠남으로 만들지 않겠는가./ 단단함. 마음 끊어 끌어낸……/ 너에게는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노래부를 힘만을.//

황동규 <한밤으로>의 전문

열 한시… 열 두시… 한 시… 두 시… 잠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모든 소리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 속에 어둠을 내리는 눈을 보며 너와의 이별을 생각하는 가슴은 둥둥 고동을 치면서 더욱 아파 온다. 너에게는 떠나버릴 힘 만을 나에게는 그걸 노래 부를 힘 만을 기원할 수 있는 시인의 마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마음 끊어 끌어낸 헤어짐으로 얻어질 단단함. 그러나 논리적 판단과 머리로만 끊음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저 떠나버릴 힘을 노래부를 힘을 기원할 뿐.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일? 난 언제 죽음까지도 노래부를 수 있을까. 

지난 5월 22일 세상을 떠난 신경림 시인을 생각한다. 그의 시 <눈>은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방됨을 기린다.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 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서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는다 해도/

어둡고 갑갑한 이 시절 몸의 감옥에서 벗어난 시인은 잎이 되고 꽃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었을까? 새가 되어 하늘 끝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얀 은가루가 되어 그의 다른 시 <떠도는 자의 노래>에서처럼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니고”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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