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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고대진] 태백산맥을 읽다

KTN Online
Last updated: 2월 16, 2026 4: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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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진 작가

◈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갑자기 티브이가 고장이 나서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아져 오래전 읽었던 대하소설 ‘태 백산맥’을 다시 시작했다.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 걸 보니 이병주의 ‘지리산’과 이태의 ‘남부군’ 을 읽은 것을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은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책에 빠지면서 가슴 떨림 을 멈출 수 없었고, 읽고 나서도 그 감동은 오래 머물러있었다. 여러 사람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거나 우리 사회에 가장 영향력이 큰 책 1위라는 평가가 전혀 아깝지 않았고 문인 100명이 뽑은 지난 100년 동안의 소설 중에서 ‘21세기에 남을 10대 작품’에 선정될만하다고 생각되었다.

소설은 1945년 8.15 광복 후부터 1953년 휴전협정으로 끝맺음하기까지, 전라남도 보 성군 벌교읍을 주된 무대로 하여 한국 근현대사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소설이다. 필자에게 관심 이 많은 제주 4.3 항쟁과 여순사건 등이 다루어져 있어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제목은 태백산맥 이지만 주 배경은 지리산이다. 작가는 후에 ‘태백산맥은 민족의 등뼈로, 끊겨진 등뼈를 다시 잇는다는 심정’으로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

임헌영 문학평론가는 말한다. “20세기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의 하나인 <태 백산맥>은 분단시대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인 지주이자 상식과 교양의 교과서이다. 이 소설을 읽지 않고는 누구도 우리 시대의 민족문제나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신앙이나 언론 등은 물론 이고 사랑을 비롯한 윤리도덕을 함부로 거론하지 마시라. 이 소설은 분단시대 한국인의 민족 생활 대백과사전이다.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모든 인간상들이 망라되어 있는 데다 그들의 생각 과 행동이 다 담겨 있어 읽고 나면 저절로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터득하 게 된다. 이런 점에서 <태백산맥>은 민족의 윤리 교범이다  “

소설은 등장인물만 250명이 넘고 찐한 전라도 토속 사투리가 많아 사전을 찾아보며 읽어야 했지만 새 단어를 알아가는 재미도 짭짤했다. 나오는 주요 인물만도 김범우, 김사용, 심재모, 박두병, 염상진, 하대치, 소화, 정하섭, 이현상, 이지숙, 죽산댁, 들몰댁, 외서댁 …등등 너무 많지만 여기선 주인공이 아닌 인물 이근술을 만나보려 한다.

소설 속의 이근술은 이승만 정권의 국가폭력 중 하나인 보도연맹 학살 당시 생명을 존중하는 신념에 따라 학살에 가담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경찰이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라면서 보도연맹 학살을 지시한 상급 기관의 명령을 듣지 않아 국군 후퇴 때 철수 명령 을 받지 못해 마을에 머물게 된다.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보도연맹 학살에 이근술이 가담하지 않은 덕분에 살아남은 지역주민의 도움을 받아 피해 있다가 발각되었는데, 염상진과 김범준은 이근술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서 석방했다. 경찰에서 퇴임한 뒤 뻥튀기 장사로 일함으로써 생 활비를 벌다가, 서민영 선생님의 권유로 야학 선생님이 되었고 서민영 선생과 함께 인도주의의 실천을 위해, 교육에서 소외된 빨치산의 자녀들을 모아 가르치는 일을 한다.

내가 특히 이근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제주도에도 비슷한 경찰관이 있었기 때문 이다.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이다. 제주 4·3 학살극이 잦아들 무렵인 1950년, 6·25전쟁이 발 발하자 제주도 4개 경찰서에 예비 검속(豫備檢束)당한 사람들이 수백 명씩 감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예비검속’이란 아직 어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자의적 인 판단만으로 사람들을 불법적으로 잡아 가두는 것을 말한다. 성산포 경찰서에도 예비검속으 로 수감된 사람이 2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제주도에 계엄령 실시 후 예비검속 중인 D급 및 C 급 중에서 현재까지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귀 경찰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 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방첩대) 대장에게 보고할 것”이라는 계엄군의 “예비 검속 자 총살집행 명령”에 대하여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 직접 써서 공문을 돌려보 내고 예비검속 수감자들을 풀어주었다. 전쟁이 벌어져 계엄령이 선포된 엄혹한 상황에서 목숨을 건 용단이었다.

당시 18세였던 강순주(표선면 가시리, 92세)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강 씨는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이 예비검속 수감자들을 풀어주면서 했던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 다. “여러분들은 죄가 없습니다. 각자 돌아가서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열심히 사십시오. 이건 제가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입니다.” 이러한 문 서장의 의로운 판단은 당시 학살 위 기에 놓였던 200여 명의 무고한 희생을 막았고, 이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느덧 할아버지 또 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었기에 문 서장이 살린 고귀한 인명은 200여 명이 아니라 4천~5천 명이 라고 할 수 있다.

1952년 제주도 경찰국 보안과 경감으로 근무하던 문형순은 곧 퇴직하였다. 독립군 출 신으로서 청렴결백했던 문형순은 퇴직 후 생계를 위해 쌀 배급소 직원을 하거나, 남의 집 단칸 방에 얹혀살면서 극장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가족도 가진 것도 없이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2018년 8월 대한민국은 문형순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였다. 같은 해 11월 1일에는 제주지방경찰청 청사 본관 앞에 문형순 서장의 흉상이 세워졌다. 그는 제주의 ‘쉰들러 리스트’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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