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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인터뷰] 6.25 참전용사 손이재, 손재순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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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흔 속에서 맺어진 인연, 다음 생에서도 이어지길 바랍니다”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20대의 젊은 군인은 이제 90대 중반이 됐다. 전쟁의 포화 속에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따듯하게 치료해 주던 19세의 꽃다운 간호사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이 이제는 가물가물하다고 전했다. 나라를 지키던 군인으로, 그런 군인들을 간호했던 간호병으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꿋꿋하게 살아온 6.25 참전 용사 손이재(94세), 손재순(89세) 부부를 만나봤다.
Q. 두분 소개를 해준다면?
손이재: 태어난 곳은 일본이다. 해방 후 부모님을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고, 20대 초반에 군대에 들어간 후, 꼭 1년 뒤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대구 공군 비행장에서 공군으로 복무를 했다.
손재순: 7세에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게 됐다. 고향은 거창이지만 공부를 마친 후 대구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했다. 6.25전쟁이 나자 당시 병원 의사선생님과 함께 마산에 있는 제2육군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를 했다.
Q.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
손이재: 휴전인 상태에서 양가 부모님의 주선으로 결혼을 하게 됐다. 나는 군대에 있었고, 안사람은 집으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전쟁 때문에 자녀들을 일찍 결혼시키는 것이 풍습이었다. 전쟁이 다시 나면 끌려나가 집안의 대가 끊길 수도 있다는 분위기가 가득한 시기여서 서둘러서 짝을 맺어주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Q. 전쟁 중 어떤 일을 했나?
손이재: 대구 비행장에서 근무를 했다. 비행기 정비를 했는데, 후방 지역이어서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지만, 한창 인민군이 몰려올 때는 포탄이 날아들기도 했다.
또 전쟁이 길어지면서 빨치산과의 전투가 한동안 이어졌다. 빨치산들로부터 비행기를 지키는 것이 임무인데, 빨치산들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맨발로 비행장에 잠입하곤 했다.
당시 총격전이 벌어지면 양쪽에 사망자나 부상자가 나오기도 했는데, 전쟁 후에도 군대에서 복무를 했는데, 약 6년간 복무 후 전역했다.
손재순: 제2 육군 병원이었지만 항생제나 붕대 하나 깨끗한 것을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약이 없어 소독도 제대로 못했다. 왠만한 상처들은 아까징끼(빨간약)만 바르는 게 전부였다. 손이 잘려 나가도, 다리가 잘려 나가도 약도 없이 붕대로 감아 놓는 것이 다였다.
국군이 한참 밀릴 때는 마산도 인민군한테 위협을 당해 잠시 떠나 있다 돌아오기도 했다. 16세에 간호사를 시작했고 전쟁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Q. 이민은 언제 오게 됐나?
손이재: 1985년에 달라스로 왔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왔기 때문에 시민권을 딴 후 장성한 자녀들을 데려왔다.
당시에 해리하인즈에서 율레스에 있는 집에 오는 길에는 아무 것도 없이 나무만 빽빽한 벌판이었다. 모두들 늦게 미국에 와서 고생들을 많이 했다. 하지만 점차 자리를 잡았고 온 가족이 잘 살게됐다. 얼마전에는 큰 손주가 아들을 낳았다. 증손주가 생긴 것이다. 큰 손주는 미 공군으로 한국에서 지내고 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손이재,손재순: 달라스에 있는 참전용사들이 한때 50여명을 넘어설 때도 있었다. 이제는 한~두명씩 가고 열 몇 명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마저도 팬데믹으로 만나지 못했고, 또 점차 거동이 힘들어서 만남이 점점 적어지고 있어 아쉽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자녀들이 또 손주들이 이곳에서 잘 살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박은영 기자 © K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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