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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최 부동산 재테크]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 Nvidia 일군 젠슨 황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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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총 2조 7천억달러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 Nvidia 일군 젠슨 황 누구?
Code Red. 의료시설에서 화재 등 긴급 상황 발생을 지칭하는 용어다.
2022년말, 구글은 오픈AI의 챗GPT 열풍에 화들짝 놀라 비상사태를 뜻하는 이 ‘코드레드’를 발령했다. 챗GPT 출시 두 달도 안된 시점에서 검색시장을 잠식당할 위협을 느낀 것이다.
‘불난 집’ 구글의 이런 위기 의식과는 반대로 챗GPT의 눈부신 성장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는 기업이 있었다. 대만 출신의 엔지니어 젠슨 황이 이끄는 Nvidia다.
엔비디아는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GPT의 두뇌에 해당하는 GPU공급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업계 최강자다. 테크 기업들의 AI 개발 경쟁과 GPU 수요의 폭발적 증가로 최근 엔비디아는 반도체 업체로는 처음으로 시가총액 2조 7천억달러를 돌파했다.
지금은 가장 핫하고 가장 잘 나가는 기업인이지만 황 CEO는 과거 여러 차례 치명적 실패를 경험했다. 파산 직전까지 갔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어록에선 절박함이 묻어난다. “나는 항상 30일 뒤 망한다고 생각하며 일한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최면을 걸었지도 모르겠다. 젠슨 황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가 물고기떼를 뒤쫓는 선장처럼 ‘포인트’를 잘 캐치하는 경영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엔비디아의 성공을 두고 젠슨 황의 확장 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도 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전쟁을 다룬 Chip War의 저자인 미국 터프츠대 크리스 밀러 교수는 엔비디아의 장점을 이렇게 적고 있다.
“엔비디아는 3차원 그래픽을 다루는 데 필요한 GPU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엔비디아의 GPU는 단순 계산을 엄청나게 많이 병렬 처리(parallel processing)할 수 있었기에 이미지를 빠르게 rendering 할 수 있었다. 인텔이나 다른 회사가 만드는 마이크로프로세서 혹은 범용 CPU(중앙처리장치)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CPU는 모든 계산을 한 번에 하나씩 순차적으로 하는 단점이 있기에 AI가 필요로 하는 수준의 연산력을 감당할 수 없다. 게다가 밀러 교수의 말을 빌리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비용’이 든다. 하지만 엔비디아가 개발한 GPU는 많은 계산을 동시에 처리하는 병렬 구조이기에 원활한 구현이 가능하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젠슨 황은 2006년 CUDA라는 소프트웨어를 시장에 내놓았다. 그러곤 엄청난 투자금이 들어간 CUDA를 무료 개방했다. 업계 밖에서도 엔비디아의 칩을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면서 CUDA는 엔비디아에 엄청나게 큰 새로운 시장을 열어 주었다. 밀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 무렵 젠슨 황은 어렴풋하게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병렬 처리의 가장 큰 수요처가 될 수 있는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바로 인공지능이었다.”
밀러 교수의 말처럼 엔비디아는 GPU 제작이라는 칩 제조사에서 ‘생성형 AI의 심장’을 만드는 AI 인프라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엔비디아는 종전의 ‘스몰’을 떼어내고 그 자체로 거인으로 우뚝 섰다. 그러면서 전 세계는 젠슨 황 CEO의 경영 방식과 리더십을 학습하고 있다. 그것도 심화 학습(딥 러닝).
젠슨 황은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대표적 인물이다. 그럼 대만에서 태어난 젠슨 황은 어떻게 미국으로 오게 됐을까? 거기엔 부모의 강한 열망과 꿈이 있었다. 대만 매체들과 CNBC에 따르면 젠슨 황의 아버지는 화학 계통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황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근로자 훈련 프로그램 덕에 미국 땅을 밟는 기회가 생겼다. 에어컨 제조업체인 Carrier에서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두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후 몇 년 동안 황의 어머니는 두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황의 어머니는 영어를 잘 했을까?
“당시 어머니는 영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황의 어머니는 영어를 할 줄 몰랐지만 매일 사전에서 무작위로 단어 10개를 골라 두 아들에게 철자와 뜻을 묻곤 했다.
“어머니는 제가 제대로 말하는지 아닌지 전혀 몰랐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런 어머니의 열망과 아버지의 꿈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 소년 젠슨 황이 미국 땅을 밟은 건 열 살 무렵인 1973년이다. 그는 몰랐을 것이다. 훗날 자신이 창업하는 회사를 도와줄 투자사 Sequoia Capital이 바로 한 해 전에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실리콘밸리의 꿈나무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젠슨 황은 수줍음을 많이 타던 소년이었다. 학창시절 패밀리 레스토랑 Denny's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곳은 내성적인 성격의 껍질을 벗겨내기엔 훌륭한 학습의 장이었다.
잡스가 매킨토시를 출시하던 1984년 오리곤 주립대를 졸업한 황은 스탠포드대에서 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실리콘밸리의 반도체기업 LSI Logic, AMD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던 1991년엔 컴퓨터 공학자 Tim Berners-Lee가 월드와이드웹(WWW)을 탄생시키는 대사건을 실리콘밸리에서 목도했다.
젠슨 황이 또 다른 껍질을 벗고 세상 밖으로 나온 건 1992년 가을 무렵이다. 캘리포니아 San Jose 동쪽 동네에 있던 식당 Denny's.
서른 살의 젠슨 황은 세 살 위인 친구들 Chris Malachowsky, Curtis Priem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면서 연신 커피잔을 비우고 있었다. 엔비디아의 창업 역사는 특이하게 이 허름한 식당에서 시작됐다.
“추수감사절 때였던 것 같아요. 저는 멋진 두 친구들과 거기 있었죠. 그 친구들은 선마이크로시스템즈라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래픽 회사를 시작하려고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었죠. 어떤 회사가 좋을지, 우리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세상에 대해 토의하고 상상했죠. 재밌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듬해인 1993년 4월, 세 공동 창업자의 의기투합으로 회사가 설립됐다. 셋은 은행에서 4만 달러를 빌렸고 Sequoia Capital이 자금을 지원했다. 회사 이름은 Next Version을 의미하는 NV에 부러움을 의미하는 라틴어 invidia가 결합되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31년. 이제 엔비디아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빅테크 기업 반열에 올랐다.
상업용 투자 전문가
에드워드 최
문의: 214-723-1701
Email: edwardchoirealty@gmail.com
facebook.com/edwardchoiinvestments
* 위의 칼럼은 부동산 산업과 재테크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으로 어떠한 법률적 조언(Legal Advice)이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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