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고대진] 발자국 남기기
페이지 정보
본문
◈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사람의 기억 중에 가장 선명한 기억은 언제일까? 이제 95세가 되시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언제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대답은 여고 시절이었다. 일본에서 전쟁 중에 다니시던 여학교 시절인데도 그때 생각이 자주 난다는 것이다.
나도 나이가 들어도 고등학교 시절 생각이 자주 난다. 대학과 대학원을 합치면 두 배나 더 오래 다녔는데도 대학 친구들보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더 편하며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가끔 한국에 들릴 때도 대학 동창들보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만나기를 더 좋아하며 고교 동창회에 가면 옛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더 순수했던 때라서 그런가?
몇 년 전 수필집을 출간했는데 한국에 간 김에 동창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권씩 주었다. 재미있게 읽었다는 소식을 많이 받았는데 그중 한 친구가 그 중 ‘발자국 남기기’라는 수필에서 심각한 오류를 발견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다음은 ‘발자국 남기기’에서 문제가 된 부분이다.
“ …작년 12월 한국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에 따라 내가 명예 회복을 할 기회가 왔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고. 이거 또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걸은 걸음이라고 하면 어쩌지 하면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기록된 역사와 나의 기억을 비교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같이 신청하자고 하면서 서류 작성을 부탁했다.
1969년 9월 내가 고등학교 삼 학년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 개헌안이 나오고 선거법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찬반 토론조차 할 수 없다는 특별법에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친구들 네 명과 삼선개헌안 변칙통과 규탄과 반대 데모를 주동하게 되었다. 시간, 장소, 동원 방법, 성명서 작성 및 낭독, 학교 방송국 장악, 방송과 신문사 연락 등등 지금 생각해도 신통할 정도로 치밀한 계획이었다. 아마 학생회장을 하던 김학렬 군이 학생회를 잘 동원할 수 있어서 였을 것이다. 시간에 맞추어 유일한 지방지 제주신문과 국영 제주 방송에 전화해서 기자를 보내줄 것도 잊지 않았다. 9월 19일 오전 아홉 시 여덟 개의 마이크가 밖으로 향해지고 전교생 900명이 모여 삼선개헌 변칙 통과 규탄 성토대회를 열었다. 김학렬 군의 성토문은 모두를 감동하게 할 명문이었다. 마침 같은 시간에 학교 앞 제주은행 창설 행사장에 와 있던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과 지방장관들이 다 모여 있어 데모는 엄청나게 큰 성공(?)이었고 그에 따른 후유증도 엄청났다.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써 몇 달 뒤 교장 선생님도 사직하게 되었다. 한밤중에 들이닥친 사복 경찰관들에게 내가 잡혀가고 나니 우리 집안이 난리 박살이 난 것은 물론이다. 우리 아버지가 당시 대학에서 학생 데모를 막아야 하는 학생처장이셨기에 더욱 심했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대학 대모는 잘 막으셨지만…. 9월 22일 자로 나와 두 친구, 김학렬 군과 강창일 군에게는 무기 정학 처분이 다른 두 친구 이태현 군과 오윤경 군에게는 유기 정학 처분이 내려졌다. 유치장에 들어가 곤욕을 치른 것은 물론이고. 결국, 기소되어 제주지법에서 단기 3개월 장기 8개월 형을 구형받았지만, 항소 끝에 광주 가정 법원으로 옮겨져 광주 소년원에서 복무하라는 처분으로 끝났다....”
“…윗글은 지난해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에 따라 다섯 명의 주모자들이 명예 회복용 서류를 작성하면서 조사한 기록에 의한 사건 경위서이다. 30년 전의 기록을 추적하기는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에서 우리를 아끼시던 선생님 몇 분이 이 처벌 기록을 우리의 학적부에서 완전히 지워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당시 제주은행 창설 행사장에 와 있던 중앙지 기자들이 데모를 취재해서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이 사건 내용과 처벌된 주동자 명단이 보도되었는데 그 신문 기사 기록과 남아있는 재판 기록으로 겨우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소년원에서의 기록은 입소자를 보호하기 위해 열람할 수 없어 도움이 안 되었다. 구체적인 날짜를 빼고는 나의 기억은 정확한 편이었다.”
문제는 정확했다고 생각했던 나의 기억이 정확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주동 학생 중 두 사람의 이름을 빼먹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학생회 부회장이었던 양영진 군과 총무부장이던 윤훈진 군을 잊어버린 것이다. 특히 양영진 군은 나와 함께 무기정학을 받아 주모자 중에 높은 처벌을 받았는데… 나중에 전화해서 내 오류에 대해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이미 발표된 책이어서 고칠 수가 없었다. 유기 정학을 받은 훈진이는 작고해서 미안함을 전할 수도 없어 더 미안했고.
나는 기억력이 상당히 좋다는 말을 들어왔다. 좀 잊어버리고 싶은 것까지 기억을 잘하는 편이라 내 기억력에 자만하고 있었는데 이 일이 있고서부터 기억에 자신이 없다. 중요한 약속도 잊어버려 혹시 치매 초기가 아니냐는 말까지 듣는 나이다. 더 잊기 전에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45년 전의 사실이지만 내가 쓴 글에 남아있는 오류는 늦게 나마 고치고 싶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