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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기다림의 미학

Last updated: 6월 26, 2020 1: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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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권은 오지 않았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주지 않는 것이 신의 뜻인가 보다고 아쉬운 생각을 저편으로 몰아넣기에는 여전히 안타깝고 속상하다. 이왕에 주시는 거면 크게 한번 쓰시지 하며 투덜거리는데  “꿈에도 그려본 적 없었던 큰 상을 받아놓고 툴툴대기에는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냐!”하고  붉어지는 노을이 꾸짖는 것 같아 얼굴이 자꾸 달아오른다. 편운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이 메일을 받고는 제일 먼저 구글링을 했다. 편운문학상은 시인 조병화가 조병화문학관을 통해 1990년에 만든 문학상이며 올해로 30회가 되었다. 수상년도를 기준으로 5년간 종합적인 성과를 심사해 수상자를 선정한다고 한다. 그런 상을 받게 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조병화 시선집『나는 내 어둠을』(1975년 민음사)은 이민 보따리에 챙겨 온 몇 권 안 되는 책 중의 하나다. 이젠 부서질 것 같이 낡고 누렇게 변했지만 외롭고 우울한 이민 생활, 그 지리한 밤을 종종 함께 건너 주었다. 평이한 언어와 소박한 어조로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 주곤 하였다. 어렵지 않은 비유로 삶을 노래했던 조병화 선생님은 닮고 싶은 시인이셨다. 그분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을 받는다는 건 내 생애 최고의 영광이 될 것이다.

 

 수상소감을 비롯해 여러 가지 요청 자료를 준비하다가 작년에 만기 된 여권이 생각났다.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이 상황에 한국 갈 일이 있겠냐며 뒤로 미뤄뒀든 게 실수였다. 부랴부랴 웹사이트에 들어가 알아본 결과 급행으로 해주던 업무는 중단이 돼 있었다. 우편으로 신청하고 그냥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판국이다. 곧바로 남편이 사진을 찍고 월마트에 이메일로 현상을 맡겨놓고 두 어 시간 뒤에 가서 찾아왔다. 그 길로 달려가 서류와 함께 여권 국으로 보내고 그날부터 내 기다림은 시작됐다. 아뿔싸 근데 이게 웬일인가. 일주일 만에 서류는 되돌아오고 말았다. 원인은 사진 바탕이 흰색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상황으로 미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남편에게 쏘아붙이고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급행으로 할 수 있다는 말에 단숨에 달려갔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날부터 다시 카운트 다운은 시작되었고 기뻐할 사이도 없이 초조한 기다림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단골 손님이 가게에 들렀다. 손님이지만 오래전부터 친구가 된 넬슨 씨는 내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쪽 사무국에 아는 분이 있으니 여권 사본을 보내 달라는 것이다. 그날부터 나의 기다림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들뜬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체통을 확인하며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취소하기를 반복했다. 한국 도착하면 바로 2주간 격리를 해야 하기에 늦어도 11일 날에는 출발을 해야 했다. 시상식이 27일 날이니 12일 날이라도 여권이 오면 그 길로 엘에이로 가서 밤 비행기를 타리라 마음먹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속 태우며 기다리던 여권은 끝내 나를 외면했다. 넬슨 씨의 애씀도 물 건너가고 에누리 없는 행정 업무에 처음으로 미국 시민이 된 걸 후회했다. 

 

 한국 일정을 묻는 주최 측에 불참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담아 이메일을 보냈다. 하루에도 몇천 명씩 죽어가는 상황에 못 간다고 가슴 아파하는 건 아니다 싶다가도 내 생전에 이런 경사가 또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면 안타깝고 속상할 뿐이다. 그동안 얼마나 상심이 크셨냐고 대리 수상자를 정해서 알려 주면 시상식 끝나고 보고드리겠다는 조병화문학관 김용정 대표님의 답신을 받으니 마음이 날아갈 듯 가뿐해졌다. 또한 몇 년 전에 최승자 시인도 몸이 편찮으셔서 대리 수상을 한 적이 있다며 위로의 말씀까지 덤으로 얹어 주시니 그분의 넉넉한 가슴을 만날 수 있어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근 한 달간을 우울하게 보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뒤란에 앉아 아무것도 못 하고 한숨으로 보냈던 시간이 그 말씀 한마디에 씻은 듯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 이제부터는 그냥 맘껏 기뻐하리라. 이젠 여권이 와도 어차피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니 우울해 해고 안타까워한대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리 생각을 바꾸고 나니 엉켰던 속이 다 풀리는 듯하다.  

 

 시상식 마치고 돌아오면 하기로 했던 축하 파티를 더 미루지 말자고 친구들이 날을 잡았다. 식당에서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있다며 감독님이 뒤란에서 고기를 구우시기로 자청하셨다. 얼마 만에 보는 얼굴들인가. 생각해보니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연말 파티를 하고 처음인 것 같다. 그동안 몇 번인가 번개팅을 생각했으나 상황에 맞춰 사는 게 옳다고 서로를 위로하며 기다려 왔다. 누구는 살이 좀 붙었다고 하고 누구는 살이 좀 빠졌다고 한다. 누구는 그사이 흰머리가 나오기 시작해서 염색을 했다고 하고 누구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니 몸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좋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오랜 기다림에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아 정신이 없지만, 마냥 좋다. 오래 기다렸다 터트리는 것들은 아름답다. 무슨 말을 해도 흉이 되지 않아 좋고 맘껏 축하해 주는 친구들과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있어 좋다. 

 

 집에 오니 남편은 고등학교 지리 선생인 친구한테서 축하 메시지가 왔다고 읽어준다. 조병화 문학관에 가본 적이 있는데 역대 수상자들의 사진과 시집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오늘의 기다림은 나를 배반했지만, 또 다른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머지않은 날에 아이들을 데리고 문학관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날의 설렘과 기쁨을 위해 오늘의 기다림은 필요한 모양이다. 그래,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 아닌가. 식구들과 함께하는 그 시간을 위해 기꺼이 기다려 주리라.

 

그녀의 날들은 

재봉틀 발판 위에서 덜덜거리다

따닥따닥 잘려나가기도 하고

잘리면서 이어지기도 하는 날들, 그런 날에

느긋한 듯 고쳐 앉아 

고봉밥 한번 대해보라는 거겠지

 

과속도 추월도 

요리조리 누벼대다 너덜해진 인생 

힘주어 밟아댈수록

더 빨리 가 닿는 제자리, 그 자리에서

무뎌진 바늘이라도 갈아 끼워보라는 거겠지

 

허영도 위선도 더더구나 사치 같은 것들

싸잡아 박아대며 굴러도

가난한 실밥은 우두둑 터지는 바퀴, 한 번쯤 탁탁 털고

목젖까지 환히 드러나는 웃음, 

그렇게 웃어보라는 거겠지

 

꽃 되어 본지 어느 세월인데

무슨 열매씩이냐며 고개 돌리는 그녀

서쪽 하늘 끝쯤에 물러나 있을 신혼방 찾아, 오늘은

군불 지피고 

따뜻한 태몽 하나 꾸어보라는 거겠지    

 

김미희, (상 준다는 말은) 전문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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