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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다시, 독주(獨走)

Last updated: 5월 15, 2020 9: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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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멈춘 것 같았던 시간은 계속 달리고 있었다. 눈부신 5월 아침이다. 아니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아침이다.
어머니 날이라고 아이들이 점심을 준비하나 보다. 사내녀석 둘이서 무슨 할 말이 저리 많을까. 큰아이 여자친구까지 합세하니 집안은 온통 달콤한 냄새와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커피잔을 들고 햇볕에 앉아 있다. 며칠 안 본 사이에 상추꽃대가 길게 올라왔다. 한 달 반 동안의 자택대피령이 풀리고 가게 문을 연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났는데 한 달은 된 것 같다.
하루 6시간 동안 가게를 지키는 일이 15시간씩 지치게 일할 때보다 더 피곤하니 그럴 수 밖에. 저녁 밥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잠을 자지 않나 평생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아마 올해에 다 겪게 될 모양이다. 첫 번째로 생일이 오는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으니 정신이 빠진 건 분명하다.

아이들이 차려준 점심을 먹고 모처럼 온 가족이 엄마한테 다녀오기로 했다. 함께 움직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미리 챙겨 둔 음식과 소주, 그리고 가까운 월마트에 들러 카네이션꽃을 샀다. 엄마가 잠든 꽃밭에는 맑은 햇살이 가득했다.
꽃밭에도 그동안 이웃이 여럿 늘었나 보다. 여기저기 많은 사람이 다녀갔는지 꽃밭에는 활짝 핀 꽃들로 환하다. 차례차례 술을 따라 잔을 올리고 절을 드렸다. 돌아오면서 버릇처럼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내게 작은 아이는 버릇처럼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저녁은 간단하게 삼겹살 파티를 하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배추도 샀다. 오늘은 모처럼 엄마표 겉절이로 엄마흉내를 내보려 한다.
일찌감치 뒤란에 상을 차린다. 주황색 테이블보를 깔고 테이블 양쪽에 아이들이 준비한 꽃병을 올려놓으니 제법 근사하다. 언제 사다놨는지 양주, 소주, 맥주, 막걸리, 복분자 등 종류별로 다 있다.
어제 친구가 소맥 한 잔 하자고 했던 게 생각이나 오랜만에 가장 친근한 소맥을 하기로 했다. 참 좋다. 적당하게 식은 저녁볕도, 적당하게 불어주는 바람도 좋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수영장 분수에서 뿜어져 내리는 물소리도 아름답다. 맑은 하늘에 새털구름도 가늘게 그린 비행운도 예쁘다. 몇 바퀴째 낮게 돌고 있는 새도 오늘따라 특별하게 보인다.
저녁 먹는 내내 친구 하고 싶은지 귀를 세우고 우리 주위를 왔다갔다 하는 토끼는 더 예쁘다. 나중에 손주 생기면 바닥에 자리를 깔고 토끼와 함께 놀아야겠다는 말하며 다 같이 웃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다. 좋은데, 이만하면 완벽한 건데 허전하다. 기쁜데 우울하다. 생각해보니 더 바라는 것도 원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적당하게 행복해 보이는 식구들과 함께라서 행복한 것도 분명하다. 적당하게 올라오는 술기운도 좋고 날씨도 최상이다. 슬픔이 가득 찬 것 같다.
언제부턴가 연일 더해가는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더는 확인하지 않는다. 이제 세상은 COVID 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거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달라진 일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너무 버겁다.
세상이 일상이 어떻게 달라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 세상에 일상에 또 익숙해져서 살아가게 될 거다. 무덤덤하고 별스럽지 않게 살아질 거다. 이제 파티는 끝이 난 모양이다. 벌여놓은 상을 치울 시간인가 보다.

다시 집안은 조용해졌다. 역시 혼술하기에는 독주가 최고이다. 사각얼음에 독기를 살짝 풀어 한 잔 비우면 둥둥 떠 있던 내 안의 섬 하나도 덩달아 스르르 가라앉는다. 그러다 보면 제일 먼저 제안의 호각 소리도 못 듣고 독주를 하던 다리가 음계를 벗어난다.
그렇게 나를 풀어놓으면 마음 가는 곳마다 모난 곳이 없어진다. 병뚜껑처럼 둥글어진다. 가끔 “딱, 따닥” 하며 얼음이 녹으면서 들려주는 독주는 기다려지기까지 해 가슴이 울렁거린다.
눈에 별들이 들어온다. 그 틈에 달도 빨려 나와 술잔에 둥둥 뜬다. 나는 위대한 자연 속에 작은 자연이 된다.
밤이 되니 쌀쌀해졌다. 봄밤이 원래 이러했던가. 반평생을 살아놓고도 잘 모르겠다. 어디 모르는 것이 봄밤 뿐인가.
남편은 요즘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종종 내가 무얼 하는지 확인을 한다. 혼자 앉아있는 걸 보고 들어가더니 스웨터를 들고 나와 걸쳐주고는 다시 들어간다.
이번 주는 다시 가게 문을 열었고, 잊고 지나칠 뻔했던 내 생일이 있었고, 어머니날까지 있어 정신없이 지나갔다. 아니, 낯설고 서툴게 왔다갔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이 어색했다.

2020년 새해를 맞으면서 생각했었다. 뛰지 않고 걸어가도 될 것 같았다. 쉬면서 걸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좌우로 휘어지는 길을 따라 길을 잃어도 보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파티는 끝났다. 그리고 전보다 더 외롭고 독한 독주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도저히 짐작도 안 되는 내일을 살아내기 위해 다시 달려야 한다.
지나고 나면 이 험한 시간에도 분명 아쉽고 추억이 될 만한 일들이 남을 것이다. 자고 놀고 꿈도 꾸게 될 것이다. 그날을 그려보며 외로운 잔을 들어 외쳐본다. 독주(獨走)를 위하여!

아끼던
조니 워커 블루 뚜껑을 따서
독주 한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는 격리 속에서
가끔 같이 한잔하던 이들의 음색을 찾아내
위하여!
홀짝 독주毒酒로 독주獨奏를 하는데
다리가 제일 먼저 풀리며 무릎 접히는 소리가
가슴에 허허한 소리로 박힌다

늘 그랬듯이 이쯤에서 뱉던
자고 나면 된다는 독백은 백발백중 명약이었지만
자가격리 외벽에서 거부당한 마침표를 보며
어쩌지 못하는 음계는
절름거리는 독주獨走의 과거를 이어갈 모양이다

CORONAVIRUS 19보다 더 독하게
나머지 목숨을 살아가야 할 일 때문에
날이 풀리거든 일찌감치 리커 스토어로 달려가
조니 워커 블루 보다 훨씬 아껴야 할
독한 것 하나 사다 놓아야겠다

김미희,(독주) 전문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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