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
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
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
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
많은 것이 디지털 기술로 이루어지고 있다. 컴퓨터, 스마트폰, 인공지능까지 첨단기술에는 디지털이 필수인 시대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아날로그 시절의 기술은 이제 초라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아날로그가 나름의 첨단기술이었고, 지금도 그때의 기술을 들여다보면 감탄스러울 때가 많다.
어린 시절 집에 있던 전축을 가지고 논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레코드 판을 턴테이블 위에 놓고 바늘을 올리면 소리가 나는 오디오 장치다. 미국에서는 바이널(vinyl)이라고 불리는 이 검은색 레코드 판은 거기서 나는 특유의 냄새로도 레코드 애호가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레코드 판에 조밀하게 나 있는 원형 홈에 바늘을 올리면 판이 돌아가고, 바늘은 미세한 홈의 모양을 따라 진동한다. 이 움직임을 소리로 바꾸어 음악을 들려주는 장치가 바로 전축이다. 어린 내 눈에는 너무나도 신기했다.
지금 생각해도 전축은 대단한 장치다. 소리를 만들어내는 바늘의 떨림은 좌우 방향의 흔들림이다. 좌우로 빨리 떨면 높은 음의 소리가 나고 천천히 떨리면 낮은 음의 소리가 난다. 여기까지는 꽤 직관적이다. 그런데 스테레오는 어떻게 구현한 것일까?
우리는 두 귀로 소리를 듣기 때문에, 현실적인 음향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간 다른 위치에서 녹음된 두 개의 소리를 두 개의 스피커로 틀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스테레오 시스템이다. 이론적으로 스테레오 시스템은 두 스피커에서 완전히 다른 소리가 나는 경우까지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레코드판에 올려진 바늘은 하나이고 그 바늘은 하나의 홈을 따라 진동한다. 두 스피커의 소리를 담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은 기발한 답을 찾아냈다.

전축의 바늘은 레코드 판에 난 V자 홈의 양쪽 면에 닿아 있다. 양쪽 면의 모양 패턴이 같다면 바늘은 좌우로만 흔들리고 양쪽 스피커에서는 같은 소리가 난다. 하지만 양쪽 면이 다른 패턴을 가지고 있으면 바늘은 좌우뿐만 아니라 상하로도 흔들린다. 즉 바늘의 상하 움직임에는 두 스피커 소리 정보의 차이가 녹아있다. 바늘의 상하좌우의 모든 움직임을 이용하면 두 소리의 정보를 복원할 수 있고 이것이 레코드 판에서 스테레오 사운드를 만드는 원리다.
전축 시스템을 만드는 엔지니어들을 괴롭힌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레코드 판을 만들 때는 소리 정보를 움직임 정보로 바꾸고 레코드 판 커터는 그 움직임에 따라 위치를 미세하게 바꾸며 판에 홈을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 소리 정보를 움직임으로 바꾸면 고음에서는 움직임 패턴이 너무 작고, 저음에서는 움직임 패턴이 너무 크게 된다. 특히 움직임 패턴이 너무 크면 옆에 있는 홈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고음 패턴은 더 증폭시켜서 새기고, 저음 패턴은 크기를 줄여서 기록한다. 재생할 때는 이를 반대로 적용한다. RIAA 이퀄라이제이션이라고 불리는 이 방법은 당시 모든 레코드 산업의 표준이 되었다.
1980년대에는 카세트 테이프 시대가 열렸다. 핵심 재료는 플라스틱 필름 위에 금속 입자를 코팅한 자기 테이프다. 이 자기 테이프에 자석을 대면 표면의 일부가 자석처럼 변하는 자화 현상이 일어난다. 자화 패턴이 바로 정보가 된다. 이 원리를 이용한 것이 카세트 테이프다. 그런데 이 물리적 현상에 큰 단점이 하나 있었다. 조용한 소리가 녹음될 때는 카세트 테이프 위에 남는 자화 정보가 소리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기록해야 할 정보와 실제 기록으로 남는 데이터가 선형 관계를 가지면 좋다. 하지만 특별한 장치가 없다면 조용한 소리 정보는 선형적인 방식으로 카세트 테이프에 기록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이것은 자석으로 자기 테이프에 자화를 유도하는 물리학적 현상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한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엔지니어들은 고주파 신호를 섞는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된다. 고주파 신호를 섞어주면 작은 소리를 테이프에 녹음할 때도 녹음 정보와 소리의 크기가 비례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또 이 고주파 신호는 주파수가 너무 높아서 실제 테이프에는 제대로 기록되지 않아 음향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비디오 테이프는 더 복잡하다. 영상은 소리보다 정보량이 월등히 많다. 비디오 테이프에 직선으로 정보를 넣었다면 2시간짜리 영화 테이프는 길이가 수십 km가 되었을 것이다. 비디오 테이프에는 폭 방향으로 보이지 않는 사선 모양의 트랙이 있고, 이 트랙을 따라 정보가 기록되어있다. 이 정보를 읽기 위해서 비디오 헤드는 계속 돌아가야 한다. 또 정보가 기록된 트랙은 서로 약 60마이크로미터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머리카락 굵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비디오 헤드가 오차 없이 어떻게 정확한 위치에서 정보를 읽을 수 있을까? 비디오 테이프의 트랙 끝에는 시간 정보가 기록되어있다. 즉 헤드가 매 트랙을 읽을 때마다 기록된 시간 정보와 시계 정보를 비교하여 속도를 올릴지 낮출지 결정한다. 그리고 읽고 있는 정보 신호의 세기를 측정하여 헤더의 위치를 계속 보정한다.
물론 이런 아날로그 시스템의 기술적 아름다움은 현대 첨단 기술 발전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시대 엔지니어들의 고민과 노력, 창의성이 지금의 엔지니어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영감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