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이 지면에 선관위를 향해 한 번 쓴 적이 있다. 달라스 동포사회도 모르게 한인회관 한쪽에서 조용히 치러진 ‘비밀 간담회’ 이야기였다. 선거철만 되면 재외동포의 소중한 한 표를 강조하다가,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문을 닫아버리는 기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6월 3일 실시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투표가 곳곳에서 멈춰 섰다. 오후 3시께 서울 송파구 잠실동, 가락동, 문정동 일대 투표소에서는 투표용지가 바닥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긴 줄을 선 채 기다려야 했고, 일부는 항의했으며, 일부는 투표를 포기한 채 돌아서야 했다.
중앙선관위 집계에 따르면 이날 전국 91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했고, 부족한 용지는 모두 7,194장에 달했다. 투표용지 인쇄량이 유권자 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투표소는 전국 1,371곳이었다. 선관위는 뒤늦게 투표 시간을 연장했지만, 이미 발생한 혼란과 불신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목할 점이 하나 더 있다. 이 91개·7,194장이라는 숫자는 선관위가 처음 발표한 수치가 아니다. 선거 직후 선관위는 50개 투표소, 4,726장이라고 했다가 사흘 만에 1.5배 이상으로 불어난 최종 집계를 내놓았다. 사태의 규모를 처음부터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초동 대응 실패에 이어 사태 파악 능력 자체도 도마에 올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선관위의 초기 해명은 “예상보다 투표율이 높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회에 제출된 자료를 통해 보다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중앙선관위는 지난해 12월 사무총장 전결로 투표용지 인쇄 기준을 유권자 대비 60%에서 50%로 낮췄고, 이어 선거 절차 사무편람 역시 같은 내용으로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공식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국가 선거를 총괄하는 헌법기관이 전국 유권자의 참정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준을 소수 간부의 전결로 변경한 것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그 이유다. 선관위는 과도한 투표용지 인쇄가 부정선거 의혹을 부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의혹을 피하려다 실제 투표권 침해 논란을 자초했다. 부정선거 의혹을 잠재우려다 오히려 더 큰 불신을 키운 셈이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니다. 공식적인 심의 절차 없이 인쇄 기준을 변경했고, 투표용지 부족에 대비한 예비 대책도 사실상 전무했다. 선거 당일 현장 대응 역시 미흡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1963년 창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사후 대응도 국민을 납득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선거 당일 밤 허철훈 사무총장이 과천청사에서 대국민 사과에 나섰고, 이틀 뒤인 5일에는 노태악 위원장과 허 사무총장, 서울시선관위원장이 나란히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노 위원장이 대법관 임기 만료로 어차피 선관위원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책임 있는 사퇴라기보다 예정된 퇴장 아니냐”는 비판까지 제기됐다.
결국 분노는 대학가로 번졌다.
6·10 민주항쟁 39주년을 맞은 지난 10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를 비롯한 전국 18개 대학 총학생회가 각 캠퍼스에서 동시다발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1987년 대학생과 시민들이 거리에서 쟁취한 1인 1표의 민주주의가 국가기관에 의해 훼손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움직임은 빠르게 확산됐다. 시국선언에 동참한 대학은 삽시간에 불어나 전국 212개 대학, 241개 캠퍼스에서 총 391건의 시국선언문과 성명이 발표됐다. 총학생회뿐 아니라 단과대 학생회, 학생 자치기구, 동아리까지 참여했다. 선관위를 향한 청년 세대의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선거 이후 조사 과정에서 관내 사전투표 결과 양당 후보의 득표수가 정확히 일치한 선거구가 12곳이나 발견되면서 또 다른 논란이 불거졌다. 선관위는 통계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우연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쉽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사회가 이처럼 작은 숫자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 자체가, 선관위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바닥났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선관위를 향한 불신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채용 비리 의혹, 사전투표 관리 부실, 북한 해킹 조직의 전산망 침투 사실이 드러난 이후에도 이어진 보안 논란, 그리고 각종 선거 관리 문제까지. 선관위는 그때마다 “문제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국민의 신뢰는 그렇게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이제 정치권도 움직이고 있다.
국회에는 국정조사 요구서가 잇따라 제출됐고 검·경 합동수사본부도 꾸려졌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국민의 참정권은 어떠한 이유로도 제한되거나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헌법적 권리”라며 철저한 진상 규명을 주문했다.
나는 지난해 달라스의 ‘비밀 간담회’를 비판하며 이런 말로 글을 맺었다.
“재외동포를 표로 보지 말고 국민으로 바라보라.”
그 말은 지금 더 크게 울린다.
선거철만 되면 재외동포의 참여를 독려하면서, 정작 국내에서는 투표용지 기준을 조용히 낮춰 수많은 혼란을 초래한 기관. 의혹을 피하겠다며 참정권 침해 논란을 불러온 기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기관이 민주주의를 흔들고 있다.
39년 전 대학생들은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리고 39년이 지난 오늘, 다시 캠퍼스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의 외침은 단순히 선관위 한 기관을 향한 비판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절차에 대한 신뢰 위에 세워진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되새기라는 경고다.
선관위는 지금 존립의 기로에 서 있다.
개혁은 선택이 아니다. 국민의 신뢰를 되찾기 위한 전면 쇄신이 필요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관리인에게 국민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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