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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내 생애 최초의 등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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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4월 23, 2026 5: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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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 / 수필가

  달라스에서 사십 년. 산은 늘 ‘갈 수 없는 방향’에 있었다. 고속도로는 끝없이 이어졌지만, 그 길 위에는 오르막이 없었다. 몸은 점점 평평한 곳에 적응했고, 마음 또한 그렇게 눕혀졌다. 한국인이라면 당연하듯 말하는 ‘등산’이라는 단어는 내게는 낯선 외국어처럼 멀게 들렸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여행을 앞두고 날아든 짧은 카톡 한 줄. “이번 일정에 트레일 있어요. 등산화 꼭 챙기세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몸 어딘가에서 오래 묻혀 있던 신경 하나가 번쩍 깨어났다. 그것은 전기에 감전된 듯한 짧고 강렬한 전율이었다. 등산이라니. 등산화라니.

  나는 그 단어들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받아들여야 했다. 출발 이틀 전, 나는 생애 처음으로 ‘등산화’를 샀다. 상자에서 꺼낸 신발은 낯설게 단단했다. 내가 알던 ‘편안한 신발’의 개념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날 밤부터 나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그 신발을 신고 다녔다. 거실을 몇 번이고 왕복하고, 마루를 천천히 걸으며, 발이 신발을 이해하도록 설득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설득이라기보다 거의 타협에 가까웠다. 발은 불평했고, 신발은 양보하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가 신발을 길들이는 것일까, 아니면 내 몸이 ‘낯선 세계에 적응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우리는 Las Vegas에 도착했다. 밤과 낮의 경계가 흐릿한 도시.
우리는 곧바로 큰 렌트카를 빌렸다. 차에 오르는 순간, 여행은 이미 절반쯤 완성된 것처럼 느껴졌다. 시동이 걸리고, 차는 천천히 도시를 벗어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화도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옛이야기, 누군가의 농담, 누군가의 반복되는 기억. 우리의 나이를 모두 더하면 오백을 훌쩍 넘었지만, 그 차 안에서만큼은 그 숫자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청춘은 나이가 아니라 ‘움직이는 방향’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

  첫 목적지는 Zion Canyon.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대한 절벽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고, 바위는 수억 년의 시간을 층층이 쌓아 올린 채
침묵 속에서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신의 정원’이라는 표현이 이토록 구체적으로 이해되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겉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압도적이었지만, 그 속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들어갈수록 경외감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처음 신은 등산화가 바위와 흙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딱딱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졌던 감각이 이제는 믿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발 아래에서 전해지는 안정감. 그것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내 몸이 다시 ‘균형’을 기억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걷고 있었지만, 사실은 다시 배우고 있었다. 서 있는 법을,
균형 잡는 법을,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해가 기울면서 공기는 급격히 식기 시작했다. 햇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생각보다 빠르게 추위가 들어왔다. 현지인들에게는 상쾌한 날씨였겠지만, 달라스에서 온 우리에게는 그보다 한 단계 더 깊은 체온의 감소였다. 몸을 움츠리면서도 우리는 웃음을 놓지 않았다.

  그날 밤, 불현듯 우리는 별을 보기로 했다. 차를 몰고,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더 높고, 더 어두운 곳으로 올라갔다. 인공의 빛이 닿지 않는 지점을 찾아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마침내, 완전한 어둠 속에 도착했을 때 하늘이 열렸다.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단순히 많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하늘 전체가 촘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하늘이 비어 있지 않고 오히려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보았던 별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의 별이 ‘기억’이었다면, 지금의 별은 ‘존재’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이 장면이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추위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추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때 우리는 ‘별에서 온 그대’들이 되어 있었다. 별은 우리를 낯설게 만들었지만, 그 낯섦 속에서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짧지만 밀도 높은 하루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Bryce Canyon으로 향했다. 그곳은 ‘한눈에 담을 수 없는 풍경’이라는 말이 가장 정확한 장소였다. 처음 마주한 순간의 인상은 ‘넓다’기보다 ‘깊다’에 가까웠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거대한 원형극장처럼 펼쳐진 협곡, 수만 개의 첨탑들이 시간의 손에 의해 조각되어 있었다. 그 풍경은 자연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 조형물이었다. 발 아래로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보며 그것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지나 지금의 형태가 되었는지를 가늠해보려 했지만, 그 시간은 상상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앞에서 인간의 시간은 짧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빛이 각도를 바꿀 때마다 색이 변하고, 그림자가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잠시 작아졌다. 그리고 이내 다시 커졌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작아지지만, 그 감각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더 깊어지는 법이다. 여행의 또 다른 풍경은 차 안에서 완성되었다. 큰 렌트카는 자연스럽게 두 무리로 나뉘었고, 각각의 공간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피어났다. 나이를 묻지 않는 대화, 과거를 가볍게 꺼내는 농담,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침묵. 그 모든 순간들이 어느 풍경보다 따뜻했다.

  돌아오는 길, 나는 문득 발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낯설고 불편했던 등산화가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내 발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그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들어 있었다. 처음 산 등산화. 장엄했던 자이언의 위용.
잊고 살았던 별과의 재회. 추위를 잊게 만든 밤의 기억. 그리고 ‘별에서 온 그대’들. 시간은 짧았지만, 경험은 깊었다. 어쩌면 나는 그 등산화를 신던 순간부터 이미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산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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