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갈리나 비시넵스카야와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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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 ] 음악계의 커플들
지난주에 로버트와 클라라 슈만 커플에 대해 소개해 드렸는데요. 클래식 커플 시리즈로 이번에는 소프아노 갈리나와 러시안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로스트로포비치의 스토리를 나눠볼 까 합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첼리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쇼스타코비치의 제자이면서 첼리스트 장한나양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역시 유명한 첼리스트로 파블로 카잘스의 제자였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0세부터 아버지에게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고 16세가 되던 1943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에게 음악 교육을 받습니다. 프로코피예프가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해 작곡하던 첼로 소나타가 작곡가의 죽음으로 미완으로 남자 카발레브스키와 함께 완성시켜 초연한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의 스승이었던 쇼스타코비치가 구 소련의 공산주의를 반대해서 교수직을 박탈당하자 로스트로포비치 역시 학교를 중최하고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합니다. 이미 수차례 국제적인 대회에서 입상해 유명세를 알리기 시작하고 1950년 스탈린 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였기에 많은 나라에서 시민권을 제안했지만 거절하고 모나코에서 비자만 발급받은채로 미국에서 활동을 합니다. 이후 소련과 서방세계의 관계가 개선되고 옐친 대통령이 시민권 회복을 제안했으나 거절했고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러시아에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 대장암으로 사망후 모스크바에 뭍혔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그녀 갈리나 비시넵스카야는 볼쇼이 극장 소속의 러시아 대표 소프라노였습니다. 림스키코프사코프 음악원에서 공부한 후 오디션을 통해 볼쇼이 오페라단에 합류해 비올레타, 토스카, 레오노어등 많은 오페라의 여주인공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둘은 만난지 4일만에 결혼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첫눈에 반한 로스트포비치가 4일동안 매일 집요하게 구애했고 마침내 성공했던 것입니다. 1955년 결혼한 이후 2007년 로스트로포비치가 사망할 때까지 52년동안 결혼 생활이 유지됩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뛰어난 첼리스트였지만, 피아노 실력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둘의 결혼 이후 그는 자주 아내의 연주에 반주자로 함께 연주했습니다. 둘은 52년의 결혼 생활동안 같은 음악적, 정치적 성향으로 미국에 망명도 함께 하고 두 딸 올가와 엘레나 를 두었습니다. 엘레나 로스트로포비치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자랐습니다.
사실 갈리나의 원래 성은 비시넵스카야가 아니었습니다. 갈리나는 로스트로포비치와 결혼전에 이미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의 경력을 가진 이혼녀였습니다. 첫번째 결혼은 항해사였던 Georgy Vishnevsky 와 했는데 그녀는 이혼 후 그의 성인 비슈네브스키를 계속 사용하게 됩니다. 그 후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레닌그라드의 라이트 오페라의 감독이던 마크 루빈(Mark Rubin) 과 결혼했는데 그는 갈리나의 매니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둘 사이에 아들이 생겼지만 2개월만에 사망하고 10년의 결혼생활 이후 이혼하게 됩니다.
갈리나가 로스트로포비치과 결혼할 당시 나이가 만 29세였는데요 이미 이전에 두번의 결혼과, 특히 두 번째 결혼은 10년 이상 지속되었단 점을 볼때 그녀는 10대에 결혼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로스트로포비치가 적극적으로 구애했다는 점을 보면 갈리나가 여러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갈리나는 뛰어난 음색과 테크닉을 가진 소프라노로 유명했으며 많은 레코딩을 남겼습니다. 미국의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은 그의 작품 War Requiem에 그녀를 위한 소프라노 파트를 작곡하기도 했으며 시인 애나 아슈마토바는 그녀를 위한 시를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갈리나와 로스트로포비치는 1991년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헬스케어 재단을 설립하기도 할 정도로 인권 운동에 열심이습니다. 갈리나는 2002년 모스크바에 본인의 이름을 딴 오페라 센터를 열고 오페라 연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 남편의 사망이후 두 딸과 함께 살다가 2012년 사망후 남편과 함께 모스크바에 장사되었습니다.
최원경
CMIT 원장
갈리나 비시넵스카야 ( Galina Vishnevskaya) 와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 Mstislav Rostropovich)
지난주에 로버트와 클라라 슈만 커플에 대해 소개해 드렸는데요. 클래식 커플 시리즈로 이번에는 소프아노 갈리나와 러시안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로스트로포비치의 스토리를 나눠볼 까 합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첼리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쇼스타코비치의 제자이면서 첼리스트 장한나양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역시 유명한 첼리스트로 파블로 카잘스의 제자였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0세부터 아버지에게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고 16세가 되던 1943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에게 음악 교육을 받습니다. 프로코피예프가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해 작곡하던 첼로 소나타가 작곡가의 죽음으로 미완으로 남자 카발레브스키와 함께 완성시켜 초연한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의 스승이었던 쇼스타코비치가 구 소련의 공산주의를 반대해서 교수직을 박탈당하자 로스트로포비치 역시 학교를 중최하고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합니다. 이미 수차례 국제적인 대회에서 입상해 유명세를 알리기 시작하고 1950년 스탈린 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였기에 많은 나라에서 시민권을 제안했지만 거절하고 모나코에서 비자만 발급받은채로 미국에서 활동을 합니다. 이후 소련과 서방세계의 관계가 개선되고 옐친 대통령이 시민권 회복을 제안했으나 거절했고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러시아에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 대장암으로 사망후 모스크바에 뭍혔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그녀 갈리나 비시넵스카야는 볼쇼이 극장 소속의 러시아 대표 소프라노였습니다. 림스키코프사코프 음악원에서 공부한 후 오디션을 통해 볼쇼이 오페라단에 합류해 비올레타, 토스카, 레오노어등 많은 오페라의 여주인공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둘은 만난지 4일만에 결혼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첫눈에 반한 로스트포비치가 4일동안 매일 집요하게 구애했고 마침내 성공했던 것입니다. 1955년 결혼한 이후 2007년 로스트로포비치가 사망할 때까지 52년동안 결혼 생활이 유지됩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뛰어난 첼리스트였지만, 피아노 실력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둘의 결혼 이후 그는 자주 아내의 연주에 반주자로 함께 연주했습니다. 둘은 52년의 결혼 생활동안 같은 음악적, 정치적 성향으로 미국에 망명도 함께 하고 두 딸 올가와 엘레나 를 두었습니다. 엘레나 로스트로포비치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자랐습니다.
사실 갈리나의 원래 성은 비시넵스카야가 아니었습니다. 갈리나는 로스트로포비치와 결혼전에 이미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의 경력을 가진 이혼녀였습니다. 첫번째 결혼은 항해사였던 Georgy Vishnevsky 와 했는데 그녀는 이혼 후 그의 성인 비슈네브스키를 계속 사용하게 됩니다. 그 후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레닌그라드의 라이트 오페라의 감독이던 마크 루빈(Mark Rubin) 과 결혼했는데 그는 갈리나의 매니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둘 사이에 아들이 생겼지만 2개월만에 사망하고 10년의 결혼생활 이후 이혼하게 됩니다.
갈리나가 로스트로포비치과 결혼할 당시 나이가 만 29세였는데요 이미 이전에 두번의 결혼과, 특히 두 번째 결혼은 10년 이상 지속되었단 점을 볼때 그녀는 10대에 결혼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로스트로포비치가 적극적으로 구애했다는 점을 보면 갈리나가 여러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갈리나는 뛰어난 음색과 테크닉을 가진 소프라노로 유명했으며 많은 레코딩을 남겼습니다. 미국의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은 그의 작품 War Requiem에 그녀를 위한 소프라노 파트를 작곡하기도 했으며 시인 애나 아슈마토바는 그녀를 위한 시를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갈리나와 로스트로포비치는 1991년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헬스케어 재단을 설립하기도 할 정도로 인권 운동에 열심이습니다. 갈리나는 2002년 모스크바에 본인의 이름을 딴 오페라 센터를 열고 오페라 연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 남편의 사망이후 두 딸과 함께 살다가 2012년 사망후 남편과 함께 모스크바에 장사되었습니다.
최원경
CMIT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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