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눈먼 자들의 도시’
페이지 정보
본문
평범한 회사원이 집으로 퇴근하는 길, 빨간 신호등 앞에서 차를 멈추고 앞을 바라보고 있다. 얼룩말을 닮은 횡단보도 위를 바쁘게 지나가는 보행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곧이어 신호등이 바뀌고 차들은 경주마처럼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중간차선에 서있던 차 한 대가 미동도 없이 멈춰 서있다. 성질이 급한 뒤쪽의 운전자들이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려대고, 차안의 남자는 두 팔을 휘저으며 뭔가 절박한 말을 외치고 있다.
마침내 누군가 차문을 열자 그 말이 확인된다. “눈이 안 보여! 우유빛 바다처럼…” 그는 방금 전까지 평범한 가장이고 회사원이었다.
어떤 도시에 ‘실명’이라는 전염병이 도진다. 실명한 환자와 접촉한 가족이나 주변인들은 모두 장님이 되며, 나중에 한 여자를 제외한 도시 전체가 장님이 된다.
처음엔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을 격리시키기도 하고, 나름대로 해결책을 강구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감염자는 늘어나고, 도시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간다. 음식을 약탈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거리엔 폭도들이 넘쳐나고 질병이 창궐한다. 청각에만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보이지 않는 세상은 무섭다. 나중에 그들은 서로에게 묻는다.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이 소설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포르투칼 작가 주제 사마라구가 1995년에 발표한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발표되자 마자 전세계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2008년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가 60대에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묘사와 역설적인 서사, 빠른전개가 특징이다. 시간적 공간적배경이 명확치 않으며 주인공들 역시 모두 우한 폐렴의 환자들처럼 몇 번 째 환자, 이런 식으로 익명이다.
이러한 설정은 이 사건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소설이나 영화가 가상현실이 아닌, 지금 바로 실재, 이 순간이 될 수도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요즈음 온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우한 폐렴, 코로나바이러스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난 불현듯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어느날 갑자기 이 신종 바이러스에 걸려 사망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이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와 접촉한 수 많은 사람들이 2차, 3차 감염자가 되면서, 격리대상과 격리장소가 늘어나고, 그 과정에서 수 많은 괴담이 떠돌고 동양인들을 향한 인종혐오 현상까지 생기고 있다.
그들 눈에 모든 동양인들은 박쥐를 식용으로 먹는 중국인들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난 ‘우한에 간 적도 없고, 중국인도 아닙니다’라고 써붙이고 다닐 수도 없어, 요즘은 공공장소에서 기침이 나오면 괜히 눈치가 보이고, 입을 가리게 된다.
오늘 아침 한국뉴스는 이제 확진자가 27명으로 늘었으며, 의심증상자들은 880명이 넘는다고 한다. 뉴스는 끊임없이 바이러스의 전파경로와 확진자들의 동선을 전하고 있으며, 불안에 떠는 시민들은 아예 공공장소에 가는 걸 꺼리는 모습이다.
본의 아니게 확진자들이 다녀간 곳들은 모두 폐쇄되어 경제적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고, 슈퍼 전파자, 일상 접촉자, 자가 격리자 등 평소엔 낯설었던 단어들이 일상어가 되어가고 있다. 마치 소설 속 상황들이 그대로 재현된 듯한 모습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짜뉴스나 괴담보다는 미담이 더 많고, 마스크 대란 속에서도, 익명의 기부가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리원량처럼 자신을 희생해서 바이러스의 심각성을 용감하게 알린 의사도 있다.
또한 처음과는 달리 전세기로 날아온 우한 교민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아산, 진천 도민들도 있어 아직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느껴진다. 시대를 막론하고 전염병은 늘 있어왔는데, 문제는 원인은 제쳐두고 자꾸 숨기려 해서 일을 더 커지게 만든다. WHO에서도 중국의 초기대응이 잘못되어 바이러스 감염이 급속도로 번지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정초부터 우울한 소식만 듣다가 어젠 정말 굿뉴스를 보게 되었다. 영화 ‘기생충’이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그것도 오스카의 꽃이라 할 만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에 국제영화상까지 4관왕이 되었으니 거의 휩쓸었다 할 만하다.
난 시상식 내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얼마나 박수를 쳤는지 모른다. 이제야 비로서 한국영화의 진가를 헐리웃에서도 인정 한 것이다.
같은 바이러스 같지만 인간의 탐욕이 만든 바이러스는 인류를 불행하게 하지만, ‘기생충’같은 바이러스는 전 세계 영화인들을 행복하게 하고, 웃게 만든다. 봄바람에 ‘기생충’처럼 좋은 창작의 바이러스만 계속 실려왔으면 좋겠다.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