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어느 피아니스트의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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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으로 교향악단의 연주회를 보러 갔습니다. 생전 처음이라 말하고 나니 부끄럽습니다. 명색이 예총회장을 역임했던 사람으로서 할 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어찌 된 일인지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민자로 살다보니 많은 것을 잊고 잃고 때론 일부러 외면하게 되었는데 클래식 음악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영화나 책에서 음악 얘기가 나오면 가끔 찾아 듣는 것이 다였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특별히 싫어한다기 보다는 잘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요. 다른 공연이었으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말았을 텐데 기쁜 마음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공연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쫒아다니는 남편 오지랖 덕분에 큰 오빠 내외분을 모실 수 있어 기다려지기까지 했습니다. 두 분과 함께 넷이서 나란히 앉아 음악회를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좋았습니다.
도착하니 오빠와 언니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 언니는 친정엄마처럼 이것저것 챙겨와 김치통과 함께 트렁크에 실어주었습니다.
왁자하게 현을 맞추던 소리가 멈추고 객석의 불이 꺼졌습니다. 영화배우같이 훤칠하게 생긴 젊은 악장이 나와 인사를 했습니다. 그룹별로 톤을 맞추고 자리에 앉자마자 연미복 차림을 한 지휘자의 중후한 모습에 그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Las Colinas Symphony Orchestra가 연주할 첫 번째 곡,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조지 프레더릭 헨델의 합주 협주곡 바장조 9번을 그의 삶과 함께 간단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헨델은 독일 출신으로 영국으로 귀화해 영국에서 활동한 독일계 영국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아무리 둘러보아도 관악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연주는 현악기로만 구성이 된 모양이었습니다.
두 번째 곡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작곡해서 오페라 ‘한여름 밤의 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20세기 중반의 영국의 대표적 작곡가, 피아니스트이며 지휘자였던 벤저민 브리튼의 심플 심포니입니다.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심플’이라는 제목 그대로 멜로디가 아담하고 소박하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2악장 ‘플레이플 피치카토’에서는 현악기의 활을 전부 내려놓고 현을 마치 기타처럼 손으로 뜯는 피치카토 기법을 사용해 발랄하기까지 했습니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소름까지 돋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부가 끝나고 Intermission. 다시 무대는 부산해졌습니다. 2부에 있을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E Minor 연주를 위해 피아노가 무대 중앙으로 등장했습니다.
얼빙 아트센터에서 조용히 앉아 공연을 보는 것은 정말 처음처럼 느껴집니다. 공연을 준비하느라 무대 뒤에서 뛰어다니든가, 무대에 오르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든가, 혹은 배우로서 가슴 졸이며 숨 가쁘게 달리고 또 달렸는데 편안하게 객석에 앉아,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관객이 되어 맘껏 박수를 보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시 객석의 조명이 꺼지고 무대에 불이 켜졌습니다. 지휘자가 이탈리아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아나 페고라로를 소개했습니다.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중년의 피아니스트, 아름다운 그녀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우수에 찬 눈빛은 왠지 슬퍼 보였습니다. 익숙한 몸동작일 텐데 오히려 안쓰럽기까지 했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자리를 잡고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연주하는 곡은 쇼팽이 19살 무렵에 한 여인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작곡한 곡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콘스탄치아, 장래가 촉망되는 소프라노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말 한 마디 붙여보지 못하고 결국 그 사랑의 열정을 피아노 협주곡에 모두 쏟아붓게 됩니다. 그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1악장 로망스와 2악장 리트게토에 고스란히 담겨 감미롭고 낭만적인 곡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까지 끝나자 관객은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길게 이어지는 박수소리에 다시 등장한 피아니스트는 마이크를 잡고 황홀한 얼굴로 앵콜송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러브 스토리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맑은 햇살을 받으며 숲을 걷다가 바람소리를 들으며 영감을 받아 작곡을 하게 되었답니다. 시작은 아름답고 평화로웠습니다. 평온한 숲에 들어온 느낌이었습니다.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내리꽂히고 있었습니다. 다시 잔잔해지며 스러졌던 풀잎이 숨을 고르며 몸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피아노 선율은 달빛에 들어 고요해졌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해졌습니다.
내 사랑에는 눈물이 고여있는 것일까요. 분명 그 곡은 격정적인 러브 스토리라고 했는데 내게는 새드 러브 스토리로 다가왔나봅니다. 유행가를 부르다 눈물 흘린 적은 많았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었나 봅니다. 소녀의 기도를 듣고 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야 예민한 사춘기였으니 그럴 만했다지만 지금 이 나이에 눈물이라니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겠지요. 눈물을 훔치면서 기뻤습니다.
로비로 나오니 피아니스트가 작곡하고 연주한 앨범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기쁘게 한 장 사서 사인까지 받아들고 눈물이 났다고 아마 새드 러브 스토리였나 보다고 했더니 환한 웃음으로 화답해주었습니다.
모처럼 함께 한 언니랑 오빠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좋았습니다. 서울 토박이 언니가 시골로 시집와 엄마가 내어준 몸빼바지 입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밭을 매던 모습이 생각 나 또 콧등이 시큰하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녀의 러브 스토리 서막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마 피아니스트처럼 아름답고 평온했겠지요. 바람은 지나가기 위해 분다고 합니다. 머물지 않고 지나가려고.
이른 오후가 되면 넓은 앨버슨 주차장의 차들을 향해 새들이 몰려든다.
어떤 이는 나무가 없어서 그런다하지만
퍼덕이는 날개 뒤집은 채 차 밑을
등 썰매 질로 콘크리트 바닥을 드나드는 것은 기름때 범벅으로
무거워진 문신을 날지 못하는 이유로 탓 할 수 없어
무국적을 자초한 회색의 알몸 때문이다
어떤 이가 전생이 박쥐여서인지 모른다 해서였을까
바닥도 올려다 보며 뒤집힌 세상을 엎드린 채 거꾸로 살아야 했던 그 새,
차디찬 역사를 빠져나와 어둠 속을 날랐다
바닥을 치고 올랐으니 어디서 날던지 콩당거리는 제 심장 소리 들으며
날기야 하겠지만, 회색 알몸 그대로인
그에게 둥지를 틀 가지 하나 내밀어
줄 나무는 있기나 할는지
김미희, (날아간 새를 위한) 전문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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