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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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참, 그럴 수가 있나… 커피잔을 입에서 떼는 순간 또 그런 탄식이 무의식 중에 흘러나왔다. 스티브 킴이 죽은 지 이미 두 달이나 지났건만, 그 이름이 불려 지거나 머리에 떠오를 때면 그렇게 매 번 가슴이 휑해지는 허망함과 함께 죄의식에 젖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라는 게 참으로 하잘 것 없다는 증거는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붕수리 작업을 하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소식을 아침에 들었는데 죽었다는 전화가 저녁에 걸려왔으니 누군들 놀라지 않을까. 그 잘난 사람이 그리 쉽게 죽을 줄이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성아, 스티브가 죽었단다! 껍데기 시인으로부터 그렇게 화급한 전언이 건너왔을 때 나는 ‘죽었단다’를 ‘깨어났단다’로 잘못 알아듣고 “에이, 그 인간 누운 김에 그냥 가지 왜 일어났어” 하고 농담했다. 스티브는 그런 농을 당할 만큼 가까운 문우들 사이에 왕따가 된 사람이다.
스티브는 ‘척’ 하기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돈 많은 척, 지식 있는 척, 영어 잘하는 척, 제 글만 명문인 척, 거기에 호인인 척, 낭만주의자인 척, 하며 전 방위적으로 잘난 척하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문학행사나 모임 후에 2차를 가면 맡아 놓고 크레딧 카드를 긁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LA 문단에 굿가이가 나타났다고 좋아하던 문우들이 언제부턴가 그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진실은 환상을 탈출한 오류이고 오해로부터 도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견 모순된 것 같이 들리는 이 말이 기실 인간의 이성으로 건축된 규범이 얼마나 허술한 토대 위에서 출발했는지 여실히 증명하는 명언이라고요. 우리가 인지하는 보편적 진짜가 라캉의 눈에는 모두 가짜로 보인다 이 말입니다.”
입가심으로 소주나 한 잔 마시자고 털레털레 따라왔던 구닥다리 문인들은 저게 무슨 소린가 눈만 껌벅이며, 자칫 무식이 드러날까 반론도 펴지 못하고 소주잔만 홀짝거렸다.
“The day is gone, and all its sweets are gone! sweet voice, sweet lips, soft hand, and softer breast! 여러분, 키츠의 이 애절한 독백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달콤했던 그날은 갔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 달콤한 입술, 보드라운 손, 쏘프터 브레스트! 위대한 문호들은 모두 사라지고 아, 우리는 지금 시인이 죽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불행이지요. 문화적 고아입니다.”
이런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무슨 문학세미나라거나 강연회 따위가 열리면 기를 쓰고 찾아다니며 초청강사를 진땀 빼게 하는 악동 짓을 했다.
세미나의 주제와 빗나간 질문을 한다거나, 자기의 지식을 장황하게 늘어놓던지, 아예 강사를 제쳐놓고 답과 결론을 내리는 둥, 건방을 떨었다. 보다 못한 진행자가 제지라도 할라치면 자신은 행사성공의 도우미라며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이런 잘난 척을 유지하기 위해 스티브가 남몰래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러는 심사를 끝내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스티브 킴의 잘난 척이 펼쳐지던 어느 날이었다. 연설을 시작하려면 마치 옛날 토크쇼 진행자 자니 카슨처럼, 두 손을 맞잡아 흔들며 “오우 오우” 하고 몸을 일으키는 스티브 특유의 모숀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잘난 척이 시작되면, 눈을 착 내려 깔고 소주잔만 털어 넣던 박정호 시인이 벌떡 일어났다. 박 시인은 아주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시 한 수 읊겠습니다” 하고 헛기침을 큼, 하더니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껍데기는 가라. 문인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산타모니카 해변의 물보라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메킨리에서 바하캘리포니아까지 향기로운 시만 남고 그 모오든 껍데기는 가라!”
박정호는 신동엽의 시를 페러디한 그 껍데기 시를 읊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스티브 킴을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바로 껍데기 아니냐는 그런 눈이었다. 아니, 껍데기라는 단어를 스티브로 바꾸기만 하면 되었다.
- 스티브는 가라, 문인도 알맹이만 남고 스티브는 가라!- 이렇게 일반명사를 고유명사로 바꾸기만 하면 바로 그가 지목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십여 명의 문인 누구라도 ‘아, 지금 박정호 시인이 스티브 킴을 까고 있구나’ 하는 것을 선명하게 알아차리게 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고소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빙그레 웃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었다. 그날부터 박정호의 별명은 껍데기 시인이 되었다.
껍데기는 가라. 그 시가 무슨 주술작용이라도 했는지, 스티브 킴의 모습이 사라졌다. 작고 큰 어떤 문학행사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스티브가 지붕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껍데기 시인이 전해왔다.
마침 그 날 오후에 한인타운 중식당에서 문학행사가 열려 거기 모인 문인들의 입 초사에 스티브가 오르내렸다.
지붕은 아무나 고치나, 올라가기 좋아하더니 결국은 떨어졌구먼. 잠시 후에 들려올 스티브의 죽음을 생각지 못한 사람들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그래도 껍데기 시인 만은 웃지 않았다.
자신의 페러디 시가 스티브 킴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죄책감에서 그러려니 하고 신경쓰지 않았다. 그랬는데 몇 시간 후에 부음을 받은 것이다. 웃을 수 없었던 껍데기 시인에게는 어떤 예감이 있었던 것이었다.
남의 잘난 척하는 모습을 왜 미워하는 것일까. 그 잘난 척도 머잖아 사라지고 말 탠데 왜 참지 못하는가. 스티브 킴처럼 미움을 받아 일찍 죽기도 하는데 그렇게 미워하는 게 정말 마땅한 일일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척, 해야 하는 스티브 킴이 그걸 못해서 우울해 하다가 높은 지붕에라도 올라간 게야, 분명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껍데기 시인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 그 시간이었다.
“나 술 한 잔 했어, 괴로워, 에이, 그 때 왜 그랬나 몰라,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고까워했는지 모르겠어. 참 나빠. 내가 생각해도 사람이 너무 악해. 내가 너무 악하다구.”
껍데기 시인, 아니 박정호 시인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는 미움을 실천한 당사자로서 자책하는 마음이 더할 것이었다.
“그래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시를 다시 지었어. 들어볼래?”
시를 새로 지었다는 박정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 약간 혀 꼬부라진 “들어볼래?” 하는 소리에 진정성이 묻어 있었다. “오케이.” 나는 작은 소리로 답했다. 마음을 추스르느라 내쉬는 박정호의 숨소리가 쉭쉭 넘어왔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껍데기는 남아라. 문인도 알맹이도 남고 껍데기도 남아라! 껍데기도 살아라. 산타모니카 해변의 물보라도 살고 껍데기도 살아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남아라. 메킨리에서 바하 캘리포니아까지 향기로운 시도 남고 그 모오든 껍데기도 남아라!”
이제 그의 이름이 불려지거나 떠오를 때면 나는 껍데기 시인이 새로 개작한 이 시를 암송하며 위로 받는다.
‘껍데기도 남아라, 알맹이도 남고 모오든 껍데기도 남아라.’ **
이용우
소설가 | LA 거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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