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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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떠올리는 작금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하루하루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봄이 왔는데 봄이 아닙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나무들은 가지마다 환하게 불을 밝히고 연둣빛 풋내를 찍어 바르며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건 황량한 길거리와 혹독한 음울만 있습니다. 봄을 만들어 보내느라 애를 쓴 우주도 지구에 온기를 보태는 태양도 밀물처럼 막을 수 없이 천천히 들이치는 공포에는 아무 기척도 되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처음 발병해 3개월여 만에 세계 110개국 이상으로 확산한 코로나 19, 지난 겨울 입구부터 서서히 조여오더니 봄이 시작되려는 순간 빨간불을 켜고 아예 막아섰습니다.
그냥 숨죽이고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시작이 되었으니 끝은 있겠지요.
그러나 그 끝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니 두려운 것입니다. 초유의 사태입니다. 작은 미생물과 세균은 햇볕(자외선)에 취약하다고 합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텍사스의 열기, 뜨거운 땡볕의 여름이 빨리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조용한 가게에 앉아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정작 손님이 들어서면 겁이 납니다. 덜컥 무서운 생각마저 들고 맙니다.
여자친구가 간신히 구해다 준 마스크를 건네주면서 꼭 사용하라고 당부하고 당부를 거듭하던 큰 아이를 봐서라도 꼭 써야 하는데 손님들은 마스크도 없이 들어오니 마스크를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합니다.
어제는 마스크를 썼다가 손님이 “너 아파?” 하며 기겁을 하는 바람에 아니라고 안 아프다고, 안 아프려고 쓴 것이라고 설명을 하느라 진땀을 흘렸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개조라도 하려나 봅니다. 악수와 포옹으로 접촉이 오랜 미덕이던 관계가 2020년 봄에 와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 하고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은 피해야 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바꿔놓고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가족을 잃고도 무한정 장례식을 미루어야 하니 슬픔이 갑절로 늘고 또 누군가는 한 해 전부터 준비한 결혼식을 미루어야 하니 패닉상태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도 잘 적응하는 동물이 맞습니다.
지난 11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 19에 팬데믹(Pandemic)을 발령하며 “인류의 비극이자 세계적 보건위기”라고 선포했습니다. 1948년 WHO가 설립된 이후 팬데믹을 선언한 사례는 이번까지 포함해 세 차례가 되었습니다.
1968년 홍콩에서 처음 발생한 홍콩독감과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입니다. 팬데믹은 WHO가 분류하는 ‘감염병 경보단계’ 6단계 중에 최고 위험등급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바이러스가 인간세계에 무시무시한 선전포고를 하고 있지만, 단결된 인간의 대응에 곧 기세가 꺾이고 말 것입니다. 인간은 늘 그래왔습니다.
기아가 오면 생산을 늘렸습니다. 질병이 퍼지면 초기에는 고전하지만, 기어코 백신을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숨 한 번 제대로 쉴 수 없게 인류를 공포로 몰아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무장을 하고 나섰습니다.
나와는 상관 없다고 느꼈던 지난 그 어떤 재난들과는 다르게 ‘나 하나쯤이야’ 하기엔 이번 사태는 너무 심각합니다.
가족을 위해 서로를 위해 나아가 인류를 위해 자제하는 방법 밖에 답이 없습니다. 그 어떤 지혜와 연륜을 총동원해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 배려의 마음, 양보의 미덕이 꼭 필요합니다.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비에 바이러스가 다 떠내려가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내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했는지 얼마 전에 친구가 갖다 놓은 홍학꽃이 눈을 맞추며 안부를 물어옵니다.
한나라 황제 원제는 북방의 흉노족과의 화친을 위해 공주를 보내야 했습니다. 원제는 궁여지책으로 공주 대신 초상화를 보고 제일 안 예쁜 궁녀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게 바로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왕소군이었습니다.
초상화와 다르게 절세가인인 그를 보내야 하는 원제를 두고, 또 눈물로 떠나는 왕소군을 두고 후에 당나라 시인 동방규는 그의 시 ‘소군원’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이 땅에는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왔지만 봄 같지가 않구나.”
창궐하는 바이러스와의 친화를 위해 한나라 황제처럼 저 예쁜 홍학꽃이라도 바치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글귀를 대문에 붙이며 희망을 꿈꾸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인사차 왔다며 그가 들고 온 화분은
홍학, 홍학꽃이었다
꽃은 전혀 기색도 않는데
하트 모양의 이파리는 정확히
흔들리고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나의 공방 어디쯤엔가
눈 하나 걸고 싶은지
내내 틈을 노리며 풋내 찍어 바르더니
며칠 전부터는 아예
노란 심지까지 드러내 놓고
설익은 모습에 멋쩍은 웃음 발라가며
한 옥타브 올린 음으로
안부를 묻기 시작한다
살살 말의 고삐가 풀리는가 했는데
음표만 날리던 얼굴에 온통
더운 숨 몰아쉬며
온몸에 꽃물이 돋고 만 것은 무슨 조화일까
때때로 삶은
서툴고 엉성해서 길을 잃는 듯하지만
마음과 말의 친화에서
덩달아 느낌표와 물음표로 섞이다가
붉게 익어 행간을 잃은 문장도 되고 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속에 함께 살아갈 달 하나 띄우고
마음속에 별 하나 그려 넣으면
그때부터는 축 늘어졌던 하루도 가부좌를 튼다
김미희, (낯 익히기) 전문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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