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영국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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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과 지숙은 대학을 졸업한 지 이십 년 만에 휴스턴에서 만나게 되었다. 영국에 사는 미란의 언니가 남편직장 때문에 휴스턴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미란이 친정엄마를 모시고 휴스턴을 방문한 것이다.
미란의 형부는 정유회사를 다니는 영국인이었다. 팔십년 대초 많은 간호사들이 사우디아라비아 병원에 취업을 했는데, 간호사였던 미란언니가 그곳에서 영국인 귀족형부를 만난 것이다.
당시 친구들은 미란에게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신데렐라가 백마 탄 왕자를 만난 것처럼 환호했는데, 그건 한국여자 치고도 좀 민주적으로 생긴 미란언니가 영국인 엔지니어와 결혼을 하는데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영국 왕족이라는 사실이었다.
“언니가 사는 곳은 런던에서 좀 떨어진 교외 지역인데 원래 영국부자들은 그런 곳에서 산대.”
친구들은 영화에서 본 영국풍경을 상기해보며, 아름다운 장미가 만발해있는 영국식 정원에서 메이드가 따라주는 홍차를 마시며, 가끔 파티에 가거나 우아한 공작부인들을 만나는 미란언니를 상상해 보곤 했다.
외국남자들은 여자 얼굴 안 봐, 그냥 필 있잖아, 필이 통하면 사랑을 한다니까… 그리고 외국남자들이 좋아하는 동양여자 얼굴은 미란언니처럼 눈이 착 찢어지고 광대뼈가 산처럼 나온 얼굴이래. 그런 얼굴을 선호한대.
지숙은 지금 미란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미란은 언니가 사는 곳이 휴스턴 부촌 부근이라고 일러주었다. 지숙은 내심 역시 왕족은 남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휴스턴 부촌을 구경할 생각에 설레이기까지 했다.
과연 입구부터 부티가 줄줄 흐르는 동네가 나타났다. 길 양쪽으로 이태리 토스카니 지방에서나 본 듯한 사이프레스 나무들이 줄을 이어 서있고, 집들은 성처럼 멀찍이 한 채씩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네비게이션 여자는 자꾸 다른 쪽으로 턴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편은 한 눈에 보기에도 평범해도 너무 평범한 지은 지 한 삼십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주택들이 있는 동네였다. 지숙은 오른쪽 골프코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네비게이션 여자가 시킨 대로 낡은 단층집들이 있는 골목을 몇 번 돌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대머리인 중년의 백인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영국식 발음으로 미란이 친구냐고 물으며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미란의 가족들은 뒷마당에 있는 풀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렌트한 집인데 휴스턴 날씨에 수영장이 있어 퍽 다행이라고 했다. 풀장 주변엔 오래된 나무가 많았는데 모기떼가 극성이었다.
미란은 저녁을 먹으며, 언니 부부가 미국을 참 좋아한다고 말했다. 특히 식비가 영국에 비해 저렴해서 살기가 좋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란엄마는 큰딸을 먹이려고 한국에서 김치와 깻잎장아찌를 가져왔는데 미란언니는 아주 오랜만에 먹어보는 것이라며 감격했다.
그날 저녁, 수영장에서 간단한 바비큐 파티가 끝나고 미란언니는 지숙을 게스트룸으로 안내했다. 오래되어 보였지만, 깨끗한 이불보가 맘에 들었다. 그런데 샤워를 하고 눕는 순간 침대가 푹 꺼지는 것이 스프링이 나간 듯 했다.
미란 말로는 영국에서 사용하던 가구를 모두 가져왔노라고 했는데, 이런 침대까지 가져온 걸 보면, 그곳에서 사는 게 녹녹치 않은 모양이었다. 허긴 거실에 있는 가구와 소파를 봤을때도 좀 놀라긴 했다. 이곳 사람들 같으면 거라지 세일에 내놔도 섣불리 살 것 같지 않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었다.
소파 천이 오래되어 보푸라기가 삐져나오고, 원래 색깔이 무슨 색깔인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낡은 소파였다. 게다가 가져온 장롱 역시 앤티크라고 하지만, 마치 빅토리아 시대에 사용했던 것처럼 낡아보였다.
미란 말로는 앤티크 사랑이 대단한 영국 사람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물건들을 잘 안 버리고 대대손손 물려준다고 했다. 게다가 미란언니는 매끼니 마다 영국에서 가져온 본 차이나를 사용했는데, 문제는 식사 한 끼를 먹고 나면 어마 어마한 양의 설거지 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식사라 해야 아주 간단한 샐러드와 치킨 몇 조각이 전부였는데, 일일이 그릇을 따로 사용하니, 그야말로 먹은 것도 없이 부산스럽기만 했다. 그런데다 식후 티 타임 때 역시 오만가지 차 세트가 다 출동해 싱크대를 가득 채웠다.
지숙이 궁금한 건 미란의 형부가 진짜 영국 귀족인가였다. 귀족이라면 하다못해 찰스 왕세자하고 먼 친척이라도 되는지, 물려받은 코딱지만한 영지라도 있는지 말이다.
그러나 지숙이 머문 동안, 본 미란의 형부는 귀족은 커녕 영국서도 근근이 생활하는 전형적인 영국서민 같았다. 허긴 귀족이라고 다 잘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숙 외가만 해도 전주 이씨 혜령군파 자손인데, 너무 평범한 대한민국 서민이다.
지숙은 미란 언니 집을 떠나며, 왠지 허전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냥 몰랐으면, 미란의 영국 형부는 친구들에게 영원한 귀족으로 남았을 것이다. 누가 허풍을 떨었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여자들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좋아하는 법이다.
현실이 우울할수록, 세상이 어수선 할수록, 신데렐라 환상은 지루한 일상을 달래주고 현실을 잊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으니까.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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