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체리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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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회전해 주세요.”
“이 길은 모르겠는데요.”
“난 알아요. 돌아가는 길이지만, 편하고 아름다워요.”
오랜만에 가슴에 오래 남을 영화 한 편을 만났다. 원래 영어가 아닌 외국영화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화면을 뚫어져라 보며 숨가쁘게 자막을 읽어내야 해서 될 수 있으면 보지 않았다. 자막 읽기에 바빠 놓치는 장면을 돌려보는 것도 불편했다.
체리향기, 이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1997년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로드 무비로 작품 전편에는 우울함과 형이상학적인 대사들로 꽉 차 있다. 특이한 점은 배경음악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전혀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음향과 영상으로 전편을 끌고 간다.
‘바디’라는 이름의 한 중년 남자가 이란의 교외, 황량한 거리를 돌고 있다. 자신의 길에 동승할 조력자를 찾는 중이다. 그는 그저 그런 사람들 속에서 선량하고 경제적으로 곤궁한 사람들을 찾아 자신의 차에 한 명씩 태운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에 누워 자살한 다음 날 아침, 자신의 시신을 위해 흙을 덮어줄 조력자를 구하기 위해서다.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전쟁이 일어나면 총을 들고 전면에 서야 하는 어린 군인이었다. 두 번째는 영생을 전하는 신학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바디를 설득할 뿐 많은 돈을 준다는 약속과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거절을 한다. 황량한 죽음의 지형에 서서 날아가는 새 떼를 올려다보는 바디. 흙 작업으로 분주한 현장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암담하게 앉아 있던 바디는 세 번째 동승하게된 노인에게서 약속을 받아 낸다.
노인은 자연사 박물관에서 죽음을 영속하는 박제 전문가다. 노인은 지금까지 바디가 가보지 않은 다른 길인 좌회전을 하라고 한다.
노인은 35년을 사막에 갇혀 살았다며 젊은 날에 있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살하려고 체리나무에 밧줄을 들고 올라갔지요. 밧줄을 매고 났는데 손에 부드러운 것이 잡혔어요. 체리였어요. 하나 따서 먹어보니 과즙이 입안에 가득 찼지요. 두 개 세 개 그렇게 먹고 있는데 그 때 산등성이에 태양이 올라오더라고요. 그 모습은 정말 장엄했어요. 그 순간 나무 밑에는 등굣길의 아이들이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나무를 흔들어 달라더군요. 체리를 주워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니 행복했어요. 아내를 위해 체리를 주워 집으로 돌아갔지요. 체리 때문에 생명을 구했어요. 보잘것 없는 체리 하나로 기분이 좋아졌고 생각이 바뀌었지요.”
잠시 바디의 이야기를 기다리던 노인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다시 말을 잇는다.
“터키인이 의사를 찾아갔어요. 터키인은 손가락으로 몸을 만지면 몹시 아프다고 말했지요. 다리도 만지면 아프고 머리도 만지면 아프다고. 배를 만져도 손을 만져도 아프다고. 그러자 꼼꼼하게 진찰을 마친 의사는 몸은 괜찮은데 손가락이 부러졌다며 “당신은 마음에 병이 들었어요”라고 말했지요.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여요.”
노인의 말을 시큰둥하게 듣던 바디는 차를 돌려 다시 박물관으로 미친 듯이 달려간다. 재확인하러 간 것이었지만, 아침에 올 때 돌멩이 두 개를 가져오라고 노인에게 부탁한다.
잠들었을 뿐 살아있을지 모르니 어깨를 흔들어 보라고 당부한다. 그렇다. 딱 저만큼의 희망이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노인은 돌멩이 세 개를 던지겠다고, 꼭 약속을 지키겠다며 돌아선다.
영화의 결말은 요즘 상황이 일상이 그렇듯 열어두고 끝이 난다. 이야기 중간중간, ‘좌회전!’ ‘우회전!’ 하며 노인이 안내하던 길이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곧고 빠른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러는 구부러지고 오르막 내리막이 있고 자갈길에 흙먼지 날리는 길도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그래서 속도를 낮추고 돌아서 가야 하는 길. 백 투 노멀이 아닌 뉴 노멀의 길 말이다.
그렇지만 기차를 탔으니 마지막 종착역까지 가야 하는 인생길 말이다. 그 길 어딘가에서 솟아오르는 샘물도 마시고 차가운 시냇물에 발을 담가 땀도 식히면서. 지난달에 떠 올랐던 보름달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기도 하고. 붉게 노을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체리나무 위에서 노인이 보았던 그 장엄한 뉴 노멀의 태양을 떠올려 보는 것도 근사할 것 같다.
“너는 김 씨네 성 안에서 ‘꼼짝 마’ 하고 들어앉아만 있을 거야?”
친구한테서 날아온 문자다. 마스크 쓰고 조심하면서 볼 사람 보고 만나야 할 사람 만나면서 사는 거라며 꼼짝도 안 하고 사는 내게 일침을 놓는다.
잘 견뎌내고 세상 좀 나아지면 얼굴 보자는 말에 기분 상하지 않았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다. 원래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장도 보지 않는지라 그냥저냥 견딜만 하다.
하지만, 뉴 노멀 라이프가 이렇게 자리를 잡나 싶어 우울은 하다. 코비드 19으로 자택 대피령이 내린 3월에 자동차 가스통을 채웠는데 6개월이 지난 지금도 3분의 1이 남아 있다. 물론 하이브리드라 도움이 많이 되긴 하지만, 그만큼 움직일 일이 없었다.
얼굴 보고 싶다고 지난주에는 아는 언니가 김밥을 들고 찾아왔다. 어제는 친구가 다녀갔고 오늘은 전화해서 가게 주소를 묻는다. 에어 프라이어를 주문했다며 가게로 갈 거란다. 나한테 보내는 선물이란다.
어디 체리향기가 따로 있는 건가. 이렇게 향기를 맡고 살면 되는 거지. 가끔 아주 참기 힘들면, 멀찍이 마주앉아 김밥 떡볶이 나눠 먹으며 밀린 얘기 풀어놓고 가슴 가득 과즙으로 채우면 되는 것이지.
“계절마다 가지각색 과일이 있지요. 여름 과일이 있고 가을 과일이 있습니다. 겨울엔 또 다른 과일이 나오고 봄도 마찬가지지요.” 노인의 말이 자꾸 생각이 난다.
이른 오후가 되면 넓은 앨버슨 주차장의 차들을 향해 새들이 몰려든다.
어떤 이는 나무가 없어서 그런다지만 퍼덕이는 날개 뒤집은 채
차 밑을 등 썰매 질로 콘크리트 바닥을 드나드는 것은 기름때
범벅으로 무거워 진 문신을 날지 못하는 이유로 탓할 수 없어
무국적을 자초한 회색의 알몸 때문이다
어떤 이가 전생이 박쥐여서인지 모른다 해서였을까 바닥도 올려다보며
뒤집힌 세상을 엎드린 채 거꾸로 살아야 했던 그 새,
차디찬 역사를 빠져 나와 어둠 속을 날았다
바닥을 치고 올랐으니 어디서 날던지 콩닥거리는 제 심장 소리 들으며
날기야 하겠지만, 회색 알몸 그대로인 그에게 둥지를 틀 가지 하나 내밀어
줄 나무는 있기나 할는지
김미희, (날아간 새를 위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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