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데스크칼럼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보며)우리는 과연 흑인일까 백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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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아폴리스 시 경찰들의 잔혹행위로 인해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죽음을 둘러싸고 미 전역이 그 어느때보다 광풍의 혼돈시기를 맞고 있다.
단지 20달러짜리 위조 지폐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네 명의 경찰들로부터 거칠게 제압당한 플로이드는 바닥에 고꾸라진 채 결박(結縛)됐고 그것도 모자라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짓 눌리며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번 사건의 기폭제(起爆劑)가 된 영상에서 경찰들에 의해 완전하게 제압당한 플로이드가 그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토해낸 말은 “숨을 쉴 수없다“(I can’t breathe)는 외 마디였을 뿐 그의 인권이 철저히 외면당한 8분여동안 그곳에 있던 경찰관 그 누구도 그의 절규에 귀 기울이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40대 흑인 플로이드는 항변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채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의 핵심은 범법자에 대한 공권력의 과잉 대응의 문제가 아니라 “숨진 플로이드가 흑인이었기 때문에 백인 경찰이 반 인권적이고 반 사회적인 공권력을 휘둘렀을 것”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길라잡이가 되어야 할 공권력이 그동안 수 없이 많은 사례에서 인종차별의 주범이 되어왔단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불구덩이에 기름을 붓듯 가라앉아 있던 인종문제가 수면위로 치솟아 올랐고 경찰이란 공권력이 보여준 인권탄압의 민 낯을 또다시 마주했다는데 대한 공분(公憤)이 폭발한 시대적 대 사건이다.
이번 사건이 불거지자 달라스를 비롯해 미 전역에서 인종차별을 반대하고 경찰의 공권력남용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불길처럼 타 올랐다.
비록 일부 과격분자들로 인해 폭력사태로 변질되면서 약탈과 방화가 이어져 평화와 정의를 위한 외침이란 애초의 의도가 다소 무색하게 되긴 했지만 집단 행동의 시작은 반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하고 정의사회를 구현하자는 데 있었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란 판단이다.
이쯤에서 나와 우리, 나아가 한인동포들의 모습이 서서히 오버랩 되어지며 문득 “과연 우리는 미국이란 사회속에서 어떤 정체성을 갖고 살고 있을까?”
“나는 백인일까? 흑인일까?”라는 질문과 대면하게 된다. 나아가 “우리에겐 이같은 비극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란 원초적 문제 앞에선 백 번을 고민해봐도 결론은 같다. “아무도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같은 소수민족이자 이민자이면서도 정작 소수민족의 권리와 권익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우리.
소수민족을 위한 그 어떤 시위나 집단행동 현장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나와 우리의 현실이다.
늘 상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시대상황을 지켜보면서 때가 되면 숟가락을 들고 서있는 모습의 스스로를 설마 황색 백인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건 아닐까?
백인들 앞에만 서면 어깨가 움츠려 들고 관대하기까지 하면서도 흑인이나 히스패닉계에대해선 똑같은 손님이고 직원이며 이웃임에도 불구하고 의심의 눈초리나 비뚤어진 잣대를 먼저 들이대고 바라보는 우리들의 민 낯과 일그러진 자화상을 이젠 지워야 할 때다.
그리고 어쭙잖은 우월감에서 하루속히 빠져나와 소수민족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존중하며 우리의 동지요 이웃으로 받아들이면서 더불어 굳건한 삶의 토대를 쌓아가려는 진지한 자세와 노력이 필요한 때다.
이역만리에서까지 끊임없이 구시대의 편견과 선입관에 사로잡혀 우리들 만의 리그에 심취해서 마치 백인이라도 된 듯한 몽환의 세계에서 비틀거릴 시간적 여유가 이제 우리에겐 없다.
Black lives matter(흑인들의 생명도 소중하다) 라는 말은 비단 백인 경찰들을 향한 흑인 사회의 경고가 아니라 기울어진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에게 향하는 소수민족들의 울분에 찬 인종차별금지의 외침은 아닐지 반성하게 만드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4.29 LA 폭동을 통해 배운 값진 교훈을 절대 잊어 선 안되는 이유다.
김길수 (KTN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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