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데스크칼럼
7월엔 3c로 만사형통의 ‘피톨’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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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contact), 연결(connection), 소통(communication)을 위하여
어떤 사회든 크고 작음을 떠나 조직간, 인물 간의 접촉과 연결, 그리고 소통은 기계를 잘 돌리는 윤활유만큼 중요하다. 신문과 방송에도 뻑 하면 자주 이 어휘들이 양념처럼 등장한다. 특히 정치판에서는 이 말을 마치 고자(庫子) 녹용 끓여먹 듯 입에다 달고 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쓰기는 똑같이 쓰지만 이 단어들의 뜻은 각각 자신이 처한 입장과 지향점에 따라 전혀 판이하게 이용 되며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촛불’이나 ‘태극기’ 세력들의 3c는 그 근본이 다르다. 따로따로 뭉쳐 시청이나 광화문 광장에서 외쳐대는 자기편들끼리의 연결과 접촉 그리고 소통은 모조리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물론 제가끔 각자의 입장에 따라 뜨거운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끼리끼리 접촉과 연결은 다소 가능하더라도, 서로간의 진정한 ‘소통’까지는 참 힘든 여정이다. 아니, 불가하다는 표현이 맞다. 왜냐면, 그 기저(基底)에 ‘인간에 대한 예의’와 세상사 불문의 상식적 범주, 내뱉는 말에 대한 합리적 사고(思考)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사안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궁극적으로 ‘소통하는 척’ 말로만 할 따름이다. 뿐 만인가? 남녀 간 사랑의 소통에 대한 접촉과 연결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것과는 영 판이하게 다르게 해석된다.
언젠가 연극배우 손숙 씨는 이런 얘기를 쓴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결혼식을 가게 되면 예나 지금이나 주례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불멸의 레퍼토리가 있다, 즉 부부 일심동체ㅡ사랑으로 ‘둘이 하나’가 되라는 말이 바로 그것인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해서는 으레 그러려니 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고 만다. 왜냐면 사람들은 처음엔 부부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진실한 소통(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차츰 사랑에 대해 관조할 만큼의 세월을 살다 보면 나중엔 이에 대해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버리고 얻은 부부의 일심동체,..과연 그것이 사랑일까? 남녀 간의 접촉이 일어나고, 스스로 또는 누군가에 의해 합쳐지는...일련의 그런 표피적인 연결은 바로 소통(사랑)이라 할 수 없다. 즉, 상대를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을 논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말이다.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와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둘 사이에 진정한 소통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둘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인식했다면, 그때 비로소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확대 해석하면 사회조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는 불과 몇 초 만에 서로가 ‘연결'되고 ’접촉‘되는 가히 불가사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초고속 인터넷 망의 발달로 지구 반대편 사람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연결되어 있다고 믿을 뿐 접촉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혹은 휴대폰으로 쉼 없이 문자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접촉을 연결 또는 ’소통‘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러다 보니 금세기의 우리는 어쩌다 바로 코앞에서 식구들끼리 함께 바라보는 것조차도 불편하게 여기는 황당한 문화 속에 살고 있다.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눈 뜬 소경의 세상이다. 아프리카 부시맨들은 덤불 속에서 나오는 상대방의 모습이 보이면 "네가 보여!" 하고 소리친다고 한다. 그러면 덤불에서 나오던 사람도 "나도 네가 보여!" 화답한다고 읽었다. 이렇듯 서로의 존재를 그대로 확인하는 이 꾸밈없는 연결이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곰곰 따져보면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성격도 취향도 식성도 모두 다르다. 학교에 다니며 친구를 만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다른 점은 더욱 커지게 된다. 더군다나 요즘은 개성을 필수 아이템으로 강요받는 시대다.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소통의 실패는 쉼 없는 접촉 속에서 진정한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데 있다. 연인 끼리든 부부 끼리든 또는 무늬가 다른 어떤 조직체이든, 그들에게 소통은 맹목적인 ‘일심동체’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먼저 이해하는 것만이 완벽한 ‘소통’을 위한 지름길 임을 알아여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돌아온 7월에는 우리 모두 3c로 만사형통의 ‘피톨’을 만들자. 소통이란 서로간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이질감을 이해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둘 중 하나가 자신을 버리든지, 아니면 소모적인 다툼의 연속으로 인생을 헛되이 살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손용상 칼럼 / 짧은 글 깊은 생각
손용상 논설위원
어떤 사회든 크고 작음을 떠나 조직간, 인물 간의 접촉과 연결, 그리고 소통은 기계를 잘 돌리는 윤활유만큼 중요하다. 신문과 방송에도 뻑 하면 자주 이 어휘들이 양념처럼 등장한다. 특히 정치판에서는 이 말을 마치 고자(庫子) 녹용 끓여먹 듯 입에다 달고 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쓰기는 똑같이 쓰지만 이 단어들의 뜻은 각각 자신이 처한 입장과 지향점에 따라 전혀 판이하게 이용 되며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촛불’이나 ‘태극기’ 세력들의 3c는 그 근본이 다르다. 따로따로 뭉쳐 시청이나 광화문 광장에서 외쳐대는 자기편들끼리의 연결과 접촉 그리고 소통은 모조리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물론 제가끔 각자의 입장에 따라 뜨거운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끼리끼리 접촉과 연결은 다소 가능하더라도, 서로간의 진정한 ‘소통’까지는 참 힘든 여정이다. 아니, 불가하다는 표현이 맞다. 왜냐면, 그 기저(基底)에 ‘인간에 대한 예의’와 세상사 불문의 상식적 범주, 내뱉는 말에 대한 합리적 사고(思考)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사안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궁극적으로 ‘소통하는 척’ 말로만 할 따름이다. 뿐 만인가? 남녀 간 사랑의 소통에 대한 접촉과 연결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것과는 영 판이하게 다르게 해석된다.
언젠가 연극배우 손숙 씨는 이런 얘기를 쓴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결혼식을 가게 되면 예나 지금이나 주례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불멸의 레퍼토리가 있다, 즉 부부 일심동체ㅡ사랑으로 ‘둘이 하나’가 되라는 말이 바로 그것인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해서는 으레 그러려니 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고 만다. 왜냐면 사람들은 처음엔 부부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진실한 소통(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차츰 사랑에 대해 관조할 만큼의 세월을 살다 보면 나중엔 이에 대해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버리고 얻은 부부의 일심동체,..과연 그것이 사랑일까? 남녀 간의 접촉이 일어나고, 스스로 또는 누군가에 의해 합쳐지는...일련의 그런 표피적인 연결은 바로 소통(사랑)이라 할 수 없다. 즉, 상대를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을 논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말이다.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와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둘 사이에 진정한 소통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둘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인식했다면, 그때 비로소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확대 해석하면 사회조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는 불과 몇 초 만에 서로가 ‘연결'되고 ’접촉‘되는 가히 불가사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초고속 인터넷 망의 발달로 지구 반대편 사람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연결되어 있다고 믿을 뿐 접촉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혹은 휴대폰으로 쉼 없이 문자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접촉을 연결 또는 ’소통‘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러다 보니 금세기의 우리는 어쩌다 바로 코앞에서 식구들끼리 함께 바라보는 것조차도 불편하게 여기는 황당한 문화 속에 살고 있다.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눈 뜬 소경의 세상이다. 아프리카 부시맨들은 덤불 속에서 나오는 상대방의 모습이 보이면 "네가 보여!" 하고 소리친다고 한다. 그러면 덤불에서 나오던 사람도 "나도 네가 보여!" 화답한다고 읽었다. 이렇듯 서로의 존재를 그대로 확인하는 이 꾸밈없는 연결이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곰곰 따져보면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성격도 취향도 식성도 모두 다르다. 학교에 다니며 친구를 만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다른 점은 더욱 커지게 된다. 더군다나 요즘은 개성을 필수 아이템으로 강요받는 시대다.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소통의 실패는 쉼 없는 접촉 속에서 진정한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데 있다. 연인 끼리든 부부 끼리든 또는 무늬가 다른 어떤 조직체이든, 그들에게 소통은 맹목적인 ‘일심동체’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먼저 이해하는 것만이 완벽한 ‘소통’을 위한 지름길 임을 알아여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돌아온 7월에는 우리 모두 3c로 만사형통의 ‘피톨’을 만들자. 소통이란 서로간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이질감을 이해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둘 중 하나가 자신을 버리든지, 아니면 소모적인 다툼의 연속으로 인생을 헛되이 살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손용상 칼럼 / 짧은 글 깊은 생각
손용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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