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첫 새벽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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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로 짝꿍들을 먼저 보낸 이십년 지기 손님들이 ‘시니어 혹은 어시스턴트 리빙’으로 옮기셨다. 화보처럼 꾸며놓고 살던 평생터전을 갑자기 떠나면서, 애장품들을 에스테이트 세일로 보내는 먹먹함에 함께 눈시울이 젖었다. 우리 진순도 진돌 남편 따라갔다.
토요일 새벽에 걷기를 시작했다. 딱히 진순 때문에 못 한건 아니었는데 진순이 남긴 물건을 보내고 뭔가 채우고 싶었나보다. 또 코로나 19로 남편의 현지 선교가 막히고 한국 여행도 편치 않다보니, 자연스레 나의 ‘작은 둥지 철수계획’이 밀렸고 한 주에 사나흘만 일하게 된 덕이다.
더 눕고 싶은 본능을 누르고 짝꿍의 권고를 따라 움직인다. 5시 반. 참 오랜만의 새벽길이다.
길 건너 교회 입구에는 전등이 한 개 뿐인데도 대낮처럼 환하다. 얼마 전 ‘도 씨의 무단방문’이후 ‘교회를 지키는 방범등’인데 아이러니컬한 세상이 됐다. 동네 길을 돌아 죠시 레인으로 나오니 여명직전의 어둠 속에서 빛 고은 감귤색 신호등이 껌뻑껌뻑 윙크를 보낸다. 도로에 차가 없으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사인이라며 ‘운전에는 꽝’인 내게 남편이 설명해준다.
플레이노 아버힐스 자연보호 지역 Arbor Hills Nature Preserve 공원으로 가는 길. 멀리 하늘과 구름과 숲이 수묵화처럼 편하다.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다양한 색의 간판불빛이 잠에 빠진 상점이름을 알려주며 지나간다. 어둔 새벽의 빛들은 당당하다. 빨강, 초록, 노랑, 흰색 개성 있는 순색으로 자신을 소개함이 아름답다.
가로등도 도로에 따라 주황색과 흰색이 교차한다.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야광 도로 표지판, 진회색 아스팔트의 우윳빛 차선, 중간의 동그란 형광불빛, 건널목 ,철도 표지판 등.
여명에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아직도 아기 새인지 ‘찌이’ 소리를 내더니 다시 잠을 청하나보다. 해 뜨기 전 공원의 워킹 트레일은 나무그늘로 어두운데 토끼 한 마리 잽싸게 가로질러 뛰어간다. 무엇이 그리 급해 새벽부터 일어났을까.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동요가 생각났다. 물만 먹으러 가는지, 세수도 하고 올 건지 궁금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난 물도 먹고 세수도 했단다, 작은 토끼야.’
‘여자들의 수다는 무죄’라고 J님과 조불조불 이야기를 하면서 걷는다. 함북에서 오신 시어머니 의 일품 음식솜씨, 첫 애 임신 때 어머니가 해주신 콩국수, 특별히 맛있어서 먹고 또 먹고, 건강한 첫아들 출산. 그에게서 본 세 아들. 십대가 된 손자들이 학교를 못가고 집에 있으니 직접 만든 돈가스와 손수 빚은 만두튀김 등 한국음식을 가져다주신단다,
일하는 며느리가 안쓰럽고 본인도 건강해서 하지만 조만간 못할 날이 올 거라고, 좋은 추억을 만든다고 하셨다. 부러웠다. 타주에 살면서 맞벌이하며 아이 키우는 아들과 며느리가 대견하고 새삼 미안하다.
모퉁이를 돌아 탁 트인 경사진 언덕, 해바라기들이 해를 기다리는데, 보름달이다!
새벽에 서쪽으로 지는 보름달. 폰으로 찰칵 한 후 찾아보니 7월의 보름달을 사슴달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달 속에 멋진 뿔이 달린 수사슴이 보인다. 계수나무에 방아 찧는 토끼는 어디로 갔을까? 옥토끼 보던 ‘한국 눈’에서 사슴이 보이는 ‘미국 눈’으로, 바뀌었나보다.
어릴 적 유엔군 고모 덕에 맛들인 ‘빠다’. 많이 먹으면 노랑머리, 파란 눈 된다고 하셨던 어른들. ‘노란 빠다’에 밥 비벼먹던 고소한 그 맛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게 이제 나타났을까.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풍습에 근거한 농사력(Farmers Almanac)에 있는 보름달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겨울이라 배고픈-늑대달 Full Wolf Moon(1월 27일). 눈이 많이 와서-눈달 Full Snow Moon(2월 26일). 봄벌레 때문에-벌레달 Fulf Worm Moon(3월 27일). 분홍색 이끼, 야생 플록스가 피는- 분홍달 Full Pink Moon(4월 26일).
세상이 꽃천지가 된다고-꽃달 Full Flower Moon(5월 26일). 딸기수확-딸기달 Full Strawberry Moon(6월 24일). 수사슴의 새로운 뿔이 나오는 시기-사슴달 Full Buck Moon(7월 24일). 철갑상어들이 많이 잡혀서-철갑상어달 Full Sturgeon Moon(8월 22일).
수확이 절정에 달해서-추수달 Full Harvest Moon(9월 21일). 낙엽이 떨어지고 사슴이 살이 쪄서-사냥꾼의 달 Full Hunter’s Moon(10월 20일). 모피를 얻기 위해 땅이 얼기 전 비버 덫을 놓는-비버달 Full Beaver Moon(11월 19일). 북반구 전체를 감싼 추위로 차가운달 Full Cold Moon(12월 18일). 이외에도 여러 다름 이름들이 있었다.
이렇게 즉석에서 손가락 하나로 얻어지는 수많고 다양한 지식들. 지식인은 넘쳐나는데 지혜자는 얼마나 될까? 성숙되지 않은 삶의 지혜로 어려움을 자초하는 지식인들.
“지식을 하나님 안에서 삶으로 풀어놓을 때 지혜가 된다고 생각해요. 또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기술,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잘 알면서도 생활로 연결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오래 믿은 사람의 진정한 고민인 것 같아요”라는 J님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어떤 이가, 수다란 “말하기의 예술이 아니라 듣기의 예술”이라고 했다. 새벽 산책길에 ‘할매끼리의 수다’를 통해 얻은 행복한 만남이 감사하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 12:3)
김정숙 사모
시인 / 달라스 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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