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TN 칼럼

[박혜자의 세상 엿보기] ‘나팔꽃’과 그릿(grit)에 관하여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2-10-07 10:44

본문

이른 아침, 커피를 들고 앞마당으로 나가니 날씨가 제법 선선하다. 소매 짧은 원피스가 살짝 춥다는 생각이 드는데, 화단 앞쪽에 지지대를 둘러싸고 정글을 이루고 있는 나팔꽃 덩굴이 누렇게 변하며 축 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날씨가 더워 그대로 두었더니, 나팔꽃 덩굴은 화단의 온갖 꽃들을 점령하고도 모자라 커다란 화분 위 까지 뻗쳐있는데 이제나 저제나 꽃은 피우지 않고 있다. 

 

올해 심은 나팔꽃은 진분홍이다. 해마다 나는 다른 종류의 나팔꽃을 심는다. 작년에는 밤에만 피는 하얀색의 문 글로리(moon glory)를 심었다. 밤에 빛나는 정원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흰색 위주의 꽃을 많이 심는다. 

그 전 해는 보라색을 심었을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웬일인지 팔월이 되어도  꽃이 피지 않았다. 물도 거름도 충분히 주었는데 잎만 무성해 질뿐 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애가 타기 시작했다. 이름에 걸맞게 아침부터 이글거리는 태양 앞에서 보란 듯이 활짝 피어 상큼한 아침을 열어주어야 마땅한 나팔꽃이 어찌된 사연인지 꽃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어서, 구글을 검색해보니 나팔꽃종류는 날씨가 너무 더우면 꽃이 잘 피지 않는다고 한다. 하긴 100도 넘는 날이 한 달도 넘게 지속되어 사람도 지쳤는데 꽃들도 오죽할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구월 중순이 지나서야 나팔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것도 예년에 비하면 크기도 작고 수도 적었다. 

뻗어나간 덩굴만 보면 온 화단이 나팔꽃으로 뒤 덮혀야 맞는데, 더위에 강한 멕시칸 벨 플라워나 분꽃에 비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이 일은 아주 작은 상징이지만 기후이변이 가져온 생태계의 변화가 우리집 화단에서도 감지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사실 되돌아보면 지난여름은 각종 재난의 연속이었다. 지구 곳곳이 폭염과 홍수에 시달리고 힌남노처럼 이름도 특이한 허리케인들이 각국의 해안가를 강타하고, 좀 잠잠해지면 국립공원에 산불이 나서 몇 천년된 나무들이 생을 달리하고, 미국이 자랑하던 알라스카 빙하마저 아이스크림처럼 녹고 있으니, 재난영화도 이보다 더 하진 않을 것 같다. 

후손들까지 걱정할 것도 없이 그간 우리가 저질러온 무분별한 소비와 생태계파괴에 대한 자연의 되갚음이 시작된 것이다. 환경학자들의 예견에 의하면 2,30년 후면 텍사스 여름은 120도가 넘을 거라고 하는데, 문득 드는 생각은,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의 생존 여부였다. 물론 기후에 맞게 변종이 시작되겠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코로나19가 가져온 생활의 변화처럼, 캐빈 피버 환자들이 늘고,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식의 진화가 시작될 지도 모른다. 그녀는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 능력중 하나로 그릿 grit (끈질긴 투지)을 꼽았는데, 그건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앤젤라 더크워스라는 심리학자 역시 정상에 우뚝 선 사람들의 특징은 재능이나 창의력, 친절함, 아이큐 보다 순수한 그릿을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베스트셀러의 책제목은 그릿에 관한 것이 많다. <그릿: 포기하고 싶을 때 계속 하는 방법>

<그릿에서 그레이트로: 끈기, 열정, 결단은 어떻게 평범한 당신을 비범하게 만드나> <그릿: 꾸준히 해내고 번창하고 성공하는 데 필요한 것에 관한 새로운 과학> 등등 말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나팔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게 없는 ‘그릿’이 나팔꽃은 확실하게 있기 때문이다. 

위로 위로 끊임없이 환경 탓을 하지 않고 감고 올라가는 능력, 포기하지 않고 비록 한 번의 생이지만 끝내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고 마는 투지가 놀랍기 때문이다. 

여리디 여린 나팔꽃을 보면 강한 것은 센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것이다. 또 친화력은 얼마나 좋은가, 화단의 모든 꽃들에게 손길을 건네고 그것도 모자라 우체통이나 새집까지도 감싸 안는다.

 

어느 덧 가을이다. 사위(四圍)가 조용해지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기차소리 마저 고향생각이 나게 만든다. 나의 고향버전은 여전히 서리가 내린 감나무위에 앉아있는 까치 모습이나 이른 새벽 데운 세숫물을 대야에 퍼주시던 어머니 모습이다. 이제 나팔꽃 덩굴을 거둘 때가 되었다. 

필 때가 있으면 질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는 법, 남은 겨울까지 그릿, 그릿을 불태우며 힘차게 살아갈 일만 남았다. 해마다 핀 다른 나팔꽃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을 위하여, 나팔꽃 사진도 저장해 두어야 겠다.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RSS
KTN 칼럼 목록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유럽에 무기를 팔고 금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전쟁이 끝났을 때 전 세계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의 3분의 2를 미국이 보유하게 되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는 바람에 달러를 많이 찍어내게 되었다. 미국은 1…
    부동산 2022-10-14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은 다양한 형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우리는 위험의 가능성 줄이기, 위험을 피하기, 위험을 수용하기, 위험부담을 전가하기, 등등이 있는데 보험은 적정한 비용을 보험회사에 지불하고 위험…
    리빙 2022-10-07 
    달라스에도 가을이 찿아왔다.불과 10일전만 하더라도 낮 최고기온이 99-100도를 오르내렸는데 요즘 달라스의 날씨는 정말 기분 좋은 한국의 가을을 생각나게한다.지금 쯤이면 거의 모든 분들이 2021년도 세금 보고를 마쳤을 것이다.세금 보고를 마쳤다는 사실은 법적 시효(…
    회계 2022-10-07 
    통풍은 주로 엄지 발가락 관절이나 무릎관절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증상으로 심한 경우 관절의 변형을 일으키기도 하는 질병입니다. 체내에 요산(Uric Acid)이라는 성분이 증가해서 요산 결정이 관절이나 연골, 힘줄, 주변 조직에 침착되어 염증을 유…
    리빙 2022-10-07 
    이른 아침, 커피를 들고 앞마당으로 나가니 날씨가 제법 선선하다. 소매 짧은 원피스가 살짝 춥다는 생각이 드는데, 화단 앞쪽에 지지대를 둘러싸고 정글을 이루고 있는 나팔꽃 덩굴이 누렇게 변하며 축 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날씨가 더워 그대로 두었더니, 나팔꽃 덩굴은 화…
    문학 2022-10-07 
    오늘의 주제는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해산물 ‘새우’입니다.한국의 해산물 판매 순위는 서양권과 많이 다릅니다. 한국 수산물 판매 대망의 1위는 수년간 요지부동 ‘김’ 이며 그 다음이 ‘고등어’ ‘오징어’ ‘굴’ 등이 이어지며 ‘새우’ 역시 상위권에 속해 있…
    문학 2022-10-07 
    - 이것이 당신이 찾았던 책이잖아 -뉴욕의 블루밍데이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두 남녀가 가죽장갑을 고르다가 해프닝이 벌어진다. 그 남자의 이름은 조나단 이었고, 여자는 사라였다.즉 그들은 동시에 가죽장갑을 사려고 했던 것인데, 결국은 사라가 사게 된다. …
    문학 2022-10-07 
    유난히 덥고 지루한 여름을 마감하면서 이제 아침/저녁에는 제법 쌀쌀함까지 느껴지게 하는 가을의 길목에 접어 들었다.예상대로 지난 9월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연준)는 0.75%의 금리 인상을 단행하였다. 이로서 3번 연속 인상이고 연말까지 1.25% 추가 인상을 예…
    회계 2022-09-30 
    스타급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아닌 이상 자본주의 시장에서 부자가 되는 방법은 단 하나, 돈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이 방법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간의 격차는 끊임없이 벌어진다. 학교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방법이…
    부동산 2022-09-30 
    왜 자꾸 소심해지는 걸까요. 결정 장애가 생긴 걸까요. 이럴까 저럴까 며칠을 고민하고 결정해도 돌아서면 후회하기 일쑤입니다.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생각해 보면 낯 뜨거운 일들이 떠올라 얼굴 붉힐 때가 많아졌습니다. 혼자라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 걸…
    문학 2022-09-30 
    오늘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술, 진로의 탄생 배경과 역사를 조금 알아보겠습니다.1924년 진로의 창업자인 장학엽이 자신의 고향인 평안남도 용강에서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합니다. 그가 소주 사업을 시작한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의 ‘진지동’은 ‘참못’이라고 불리며 예전부터…
    문학 2022-09-30 
    통계적으로 보면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50%정도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50%정도는 개인 주택이나 아파트를 임대해서 살고 있다고 한다.그런데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거의가 주택 보험에 가입하고 있는 반면 임대거주자들의 경우는 20% 정도만이 임대자 보험…
    리빙 2022-09-23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10년 전 필자가 ‘Cash is King’ 이라는 칼럼을 게재했는데 10년 후인 오늘 ‘Dollar is King’이라고 주어만 바뀐 칼럼을 쓰고 있노라니 지금의 상황과 10년 전의 상황이 거의 비슷한 현실에 ‘역사는 반복된…
    회계 2022-09-23 
    8/28일 호놀룰루 이노우에 국제공항. 호놀룰루의 언론 TV방송사들은 온통 리틀리그 월드 시리즈에서 챔피언을 거머쥐고 귀환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비추기에 바빴다.공항에는 어린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합세한 환영 인파가 몰려들어 소리를 지르고 레이를 걸어주고 난리였다.“…
    문학 2022-09-23 
    조금은 선선해진 9월을 맞이했습니다.오늘의 주제는 ‘돼지고기 특수부위’로 정했습니다. 돼지고기의 인기부위는 한국 기준으로 ‘삼겹살’, ‘목살’ 그리고 ‘돼지갈비’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맛과 가격 모두가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리빙 2022-09-23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