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박혜자의 세상 엿보기] ‘나팔꽃’과 그릿(grit)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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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커피를 들고 앞마당으로 나가니 날씨가 제법 선선하다. 소매 짧은 원피스가 살짝 춥다는 생각이 드는데, 화단 앞쪽에 지지대를 둘러싸고 정글을 이루고 있는 나팔꽃 덩굴이 누렇게 변하며 축 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날씨가 더워 그대로 두었더니, 나팔꽃 덩굴은 화단의 온갖 꽃들을 점령하고도 모자라 커다란 화분 위 까지 뻗쳐있는데 이제나 저제나 꽃은 피우지 않고 있다.
올해 심은 나팔꽃은 진분홍이다. 해마다 나는 다른 종류의 나팔꽃을 심는다. 작년에는 밤에만 피는 하얀색의 문 글로리(moon glory)를 심었다. 밤에 빛나는 정원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흰색 위주의 꽃을 많이 심는다.
그 전 해는 보라색을 심었을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웬일인지 팔월이 되어도 꽃이 피지 않았다. 물도 거름도 충분히 주었는데 잎만 무성해 질뿐 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애가 타기 시작했다. 이름에 걸맞게 아침부터 이글거리는 태양 앞에서 보란 듯이 활짝 피어 상큼한 아침을 열어주어야 마땅한 나팔꽃이 어찌된 사연인지 꽃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어서, 구글을 검색해보니 나팔꽃종류는 날씨가 너무 더우면 꽃이 잘 피지 않는다고 한다. 하긴 100도 넘는 날이 한 달도 넘게 지속되어 사람도 지쳤는데 꽃들도 오죽할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구월 중순이 지나서야 나팔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것도 예년에 비하면 크기도 작고 수도 적었다.
뻗어나간 덩굴만 보면 온 화단이 나팔꽃으로 뒤 덮혀야 맞는데, 더위에 강한 멕시칸 벨 플라워나 분꽃에 비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이 일은 아주 작은 상징이지만 기후이변이 가져온 생태계의 변화가 우리집 화단에서도 감지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사실 되돌아보면 지난여름은 각종 재난의 연속이었다. 지구 곳곳이 폭염과 홍수에 시달리고 힌남노처럼 이름도 특이한 허리케인들이 각국의 해안가를 강타하고, 좀 잠잠해지면 국립공원에 산불이 나서 몇 천년된 나무들이 생을 달리하고, 미국이 자랑하던 알라스카 빙하마저 아이스크림처럼 녹고 있으니, 재난영화도 이보다 더 하진 않을 것 같다.
후손들까지 걱정할 것도 없이 그간 우리가 저질러온 무분별한 소비와 생태계파괴에 대한 자연의 되갚음이 시작된 것이다. 환경학자들의 예견에 의하면 2,30년 후면 텍사스 여름은 120도가 넘을 거라고 하는데, 문득 드는 생각은,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의 생존 여부였다. 물론 기후에 맞게 변종이 시작되겠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코로나19가 가져온 생활의 변화처럼, 캐빈 피버 환자들이 늘고,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식의 진화가 시작될 지도 모른다. 그녀는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 능력중 하나로 그릿 grit (끈질긴 투지)을 꼽았는데, 그건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앤젤라 더크워스라는 심리학자 역시 정상에 우뚝 선 사람들의 특징은 재능이나 창의력, 친절함, 아이큐 보다 순수한 그릿을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베스트셀러의 책제목은 그릿에 관한 것이 많다. <그릿: 포기하고 싶을 때 계속 하는 방법>
<그릿에서 그레이트로: 끈기, 열정, 결단은 어떻게 평범한 당신을 비범하게 만드나> <그릿: 꾸준히 해내고 번창하고 성공하는 데 필요한 것에 관한 새로운 과학> 등등 말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나팔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게 없는 ‘그릿’이 나팔꽃은 확실하게 있기 때문이다.
위로 위로 끊임없이 환경 탓을 하지 않고 감고 올라가는 능력, 포기하지 않고 비록 한 번의 생이지만 끝내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고 마는 투지가 놀랍기 때문이다.
여리디 여린 나팔꽃을 보면 강한 것은 센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것이다. 또 친화력은 얼마나 좋은가, 화단의 모든 꽃들에게 손길을 건네고 그것도 모자라 우체통이나 새집까지도 감싸 안는다.
어느 덧 가을이다. 사위(四圍)가 조용해지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기차소리 마저 고향생각이 나게 만든다. 나의 고향버전은 여전히 서리가 내린 감나무위에 앉아있는 까치 모습이나 이른 새벽 데운 세숫물을 대야에 퍼주시던 어머니 모습이다. 이제 나팔꽃 덩굴을 거둘 때가 되었다.
필 때가 있으면 질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는 법, 남은 겨울까지 그릿, 그릿을 불태우며 힘차게 살아갈 일만 남았다. 해마다 핀 다른 나팔꽃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을 위하여, 나팔꽃 사진도 저장해 두어야 겠다.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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