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소담 한꼬집’ ] 사랑의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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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문 스크린 앞에 서자 눈 덮인 산과 흐린 하늘이 열렸다. 모든 게 얼어버린 듯한 그곳에 희뿌연 구름이 한 방향을 고집하며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을씨년스럽고 쓸쓸한 겨울 풍경이었다. 뭘 꺼내려 했는지도 잊은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문득 조금 전 페이스북에서 보았던 노시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분도 그렇게 눈이 덮인 길가에 홀로 서 있었다. 남편이 돌아가신 후 오랜 세월 힘들어했던 그분이 홀로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는 게시물을 2주 전에 올렸다.
“운전 도중에 짙은 안개 속에 갇히기도 했고, 흐리고 눈발도 흩날렸지만 아주 가끔씩은 햇빛이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도 이럴 것이다. 혼자 걸어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외로움에 운전하는 동안 자꾸 눈물이 났지만… 괜찮다. 지금처럼 이렇게 용기를 내서 걸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 두 개가 더 올라왔다. 조심스레 여정을 뒤따르며 올려놓은 글을 읽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분은 남편과 같은 일을 해 늘 함께 다녔다. 두 분 다 작가이고 금실 좋던 부부여서 참 보기 좋았다. 홀로 남은 부인이 어찌 견디실까 걱정했는데, 잘 추스르고 일어나신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다. 세상에 혼자 남는 일만큼 두려운 게 또 있을까. 남편 없이 할 줄 아는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 그런가 상상만으로도 무섭다.
근간 소천 소식이 많았다. 가까운 교수님의 부친이 돌아가셨고, 사돈어른의 부고가 있었다. 큰 병 없이 수를 다하여 돌아가셨으니 호상이었음에도 그분 부고에 털썩 주저앉았다. 언니는 권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 사돈어른은 친정어머니를 일찍 여윈 언니를 친자식처럼 대해 주셨고 나와 동생까지 같은 마음으로 품어주셨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매년 햅쌀을 보내주셨고 김장 때면 김치와 장을 보내주셨다. 첫 조카가 생겨 그 집 문턱을 수없이 드나들었을 때도 늘 새 밥에 새 찬을 만들어 차려 주시며 허한 자리를 채워 주셨다. 결혼 후에도 늘 먹거리와 자식 번성을 빌어 주셨다.
처음 사돈어른댁을 방문했을 때 생각이 난다. 그 댁엔 증조부모님까지 4대가 함께 살았다. 층층시하인 집을 처음 가 본지라 예법을 몰랐다. 그날 대청마루에 어르신들이 앉아 계셨는데, “안녕하세요?” 하며 꾸벅 폴더 인사를 하고 말았다. 기겁한 사돈어른이 귀띔해 주신 덕분에 절을 올리고 위기를 모면했다. 발을 친 대청마루에서 모시옷을 입고 부채를 부치며 담소를 나누시던 어르신들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밥상을 차릴 때도 여러 개로 나누어 따로 차렸고 여자들은 남자들이 상을 무른 후 나중에 먹었다. 음식을 놓는 자리도 사람이 앉는 자리도 정해져 있었다. 삶 자체가 사극에 나오는 분들 같았다. 사돈어른은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으셨고 집안의 큰 살림을 지혜롭고 당차게 해내던 분이셨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언니 시댁 어르신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시어머님만 살아 계셨다. 전화로만 소식을 들었던 사돈어른을 뵈러 갔었다. 치매를 앓고 계셔서 요양병원으로 가야 했다. 그 단정하고 부지런하고 기품 있던 분이 검버섯 핀 노인이 되어 누워 계셨다. 사돈어른은 단번에 나를 알아보셨다. 보자마자 “이모, 얼른 아들 하나 더 낳아유.”라고 하셨다. 그게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세월을 비껴가는 장수는 없었다. 언니 집에는 시부모님이 쓰던 물건이 많다.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하나도 버릴 수 없다는 게 언니와 형부의 생각이었다. 남들이 다 오래된 집 내부를 개조하여 현대식으로 만들 때도 그분들이 쓰던 공간을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좋은 분이 아니었다면 한 성깔 하는 우리 언니가 엄마라고 부르며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돈어른은 남편이 계신 현충원에 묻히셨다. 추울 때 가셔서 마음이 아프다. 나는 그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무쪼록 좋은 곳에서 편히 지내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좀 전까진 보이지 않던 스크린 속 글씨가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화씨 27도,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책상으로 돌아와서야 알았다. 보리차가 필요했다는 걸. 두꺼운 머그잔에 보리차를 따라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뜨거워진 물을 마시고 잔을 배에 대니 몸이 한결 따뜻해졌다. 날씨에 따라 스크린의 배경 그림이 바뀐다는 걸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늦게 눈치챘다. 꽤 비싼 값을 치르고 샀던 걸로 기억한다. 부엌일 하면서 누가 냉장고 문에 달린 스크린을 보겠냐며 쓸데없는 돈 쓴다고 툴툴댔었다. 전화기와 연동하면 편리한 기능이 많은 우리 집 가전제품들을 하나도 쓰지 않으니 내겐 첨단 시스템이 무용지물이다.
블라인드를 열어보니 길과 지붕에 눈이 쌓였다. 해가 가려져 사물의 경계가 흐리다. 아이들 등쌀에 못 이겨 밖으로 나온 부모님들이 차 뒤에 고무 튜브나 수영장을 매달아 저속 운전으로 눈썰매를 끌며 지나간다. 골목에 퍼지는 아이들 목소리가 모처럼 높다. 작년 이맘때도 윈터 스톰이 왔었다. 2월로 가는 길목 어딘 가에 도사리고 있다가 그때도 행패를 부리고 떠났다. 기온이 뚝 떨어지니 뼈가 아프다. 동전 파스를 여기저기 붙이고 이 추운 날 얼음주머니를 찼다 뺐다 하며 허리를 달래는 중이다. 이까짓 아픔이 상실의 아픔만 할까.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이 나이가 되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서 흐린 날이 가고 밝은 날이 찾아와 유가족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으면 좋겠다.
내게 쌓인 사랑의 빚은 얼마일까? 다 갚고 떠날 수는 있을까? 2월 초하루, 나는 잘살고 있는지 반문해 본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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