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포들이 국내에 세금 냅니까?”
지난 21일 월요일, 김경협 재외동포청장이 취임 후 처음으로 달라스를 찾아 동포 간담회를 가졌다. 그날 청장이 들려준 일화 하나가 오래 귀에 남는다. 700만 재외동포에게 쓰이는 연간 예산이 1인당 평균 1만6천 원 남짓이니 적어도 100달러 수준까지는 올려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더니, 옆자리에서 저 한마디가 돌아왔다고 한다.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일하고 그 나라에 기여하는 사람들을 왜 한국의 세금으로 도와야 하느냐는 말이였다.
청장은 재외동포를 수출시장을 넓히는 경제 영토의 확장자이자 한류의 전파자, 민간 외교관으로 다시 보게 하겠다며 인식 개선과 미담 발굴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간담회를 마무리하며 꺼낸 마지막 당부는 훨씬 직설적이었다. 재외동포를 위한 복수국적 허용 연령을 낮추는 일도, 우편·전자투표 도입도, 한글학교 지원도 결국 한 가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재외국민 유권자는 200만 명인데 실제로 투표하는 사람은 20만 명, 이 정도 투표율로는 국회를 아무리 찾아가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고 했다. 예산 당국 장관의 멱살을 잡을지라도 소용없다고, 중요한 것은 동포사회가 가진 힘이고 그 힘의 크기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이 투표율이라고.
숫자는 그의 말을 그대로 뒷받침한다. 지난해 21대 대선에서 추정 재외선거권자 197만여 명 가운데 실제로 투표한 사람은 20만5천여 명, 10.4%였다. 당시 ‘역대 최고’로 발표된 79.5%라는 투표율은 선거인명부에 등록한 사람만을 분모로 삼은 수치다. 2024년 총선은 더 초라해서, 전체 재외선거권자 대비 실질 투표율은 4.7%에 그쳤다. 동포들이 세금을 내느냐는 질문 뒤에는, 어차피 표를 던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계산이 숨어 있는 셈이다.
태평양 이쪽의 사정은 얼마나 다를까.
텍사스 한인사회는 지금 전례 없는 성장기를 지나고 있다. 연방 센서스 아메리칸커뮤니티서베이(ACS)에 따르면 텍사스 한인 인구(혼혈 포함)는 2023년 13만152명에서 2024년 14만4,971명으로 늘었다. 2024년 한 해 증가율 11.4%는 전국 한인 증가율 9.3%를 크게 웃돈다. 같은 해 뉴욕주는 14만7,548명으로, 전년도 15만 548명보다 4.27%가 줄어 두 주의 격차는 2,577명까지 좁혀졌다. 최근 5년 간의 데이터를 보면 텍사스주는 상승세, 뉴욕주는 꾸준한 하향세이다. 예년 같으면 이달 중순 나왔을 2025년 ACS 1년 추정치는 센서스국 내부 사정으로 발표가 미뤄졌지만, 이 추세대로라면 텍사스는 이미 캘리포니아에 이어 미국 내 한인 인구 2위 주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인구가 곧 힘은 아니다. 정치인이 들여다보는 것은 인구 통계표가 아니라 투표자 명부다. 2022년 중간선거에서 미국 태생 시민의 투표율은 53.4%였지만 귀화 시민은 41.4%에 머물렀다. 한인 유권자는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2024년 대선에서도 58%만 투표소를 찾았다는 AAPI 데이터 분석치가 있다. 열에 넷은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도 한 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관심이 식는 중간선거에서는 투표율이 더 내려가는 것이 보통이다.
텍사스의 아시안 인구는 급성장하는 데 비해 투표율은 타인종보다 현저히 낮다고 AAAF(Asian American Action Fund)의 앨버트 쉔 의장은 말했다. 또한 정치인들이 투표율이 낮은 유권자 그룹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는 재외동포청장의 발언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이민자는 두 나라의 유권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한인사회는 두 개의 투표함 앞에 나뉘어 서 있다. 시민권을 받은 이는 미국 선거에서, 영주권자와 주재원·유학생은 한국 재외선거에서, 65세 이상 복수국적자는 양쪽 모두에서 한 표를 행사한다.
한국 쪽 투표함은 문이 좁다. 한국 내에는 6천 명당 투표소 하나가 있지만 재외국민에게는 3만 명당 하나뿐이라고 청장은 설명한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멀어도 투표소까지 40km 안쪽이지만 해외에서는 수백 km를 달려야 하는 이들이 많다. 우편·전자투표를 도입하려면 올해 안에 국회가 결론을 내야 내년 한 해 시스템을 구축하고 시험해 2028년 총선부터 시행할 수 있다고 한다. 복수국적 허용 연령 하향 역시 법무부와 병무청, 보건복지부의 벽을 넘어야 한다. 그 벽을 움직이는 것은 명분보다 숫자다. 문이 좁다고 탓하기 전에 좁은 문으로라도 들어가는 사람이 많아야, 문을 넓혀 달라는 목소리에 무게가 실린다.
미국 쪽 투표함은 반대로 문이 이미 활짝 열려 있다. 시민권자라면 등록만 하면 되고, 텍사스에는 열흘 넘는 조기투표 기간도 있다. 청장은 뉴욕과 오렌지카운티의 한인사회가 주·카운티 예산을 확보해 박물관과 회관을 세우는 사례를 들며, 지역 의회에 우리를 대변할 사람을 세우면 예산은 물론 인허가까지 수월해진다고 했다. 모국 정부의 지원을 기다리기 전에 우리가 사는 곳에서 먼저 힘을 보여 달라는 주문이다. 뼈아프지만 정확한 말이다. 열린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공동체가 좁은 문을 넓혀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부터 돌아본다. 2년 전 이맘때 필자는 대선 조기투표소의 긴 줄 끝에서 ‘내 한 표가 무슨 대수일까’, 기권을 떠올렸노라고 이 지면에 고백했었다. 결국 한 표를 행사하고 나왔지만 그 망설임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빠서, 누가 되든 달라질 게 없다는 체념 때문에, 영어로 빼곡한 투표용지가 부담스러워서 우리는 투표소 앞에서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민 정책 하나하나가 한인 가정의 일상을 흔드는 요즘, 그 빈자리의 대가는 이민 제도와 자녀들의 학교, 우리 동네의 치안처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청구서로 돌아온다.
날짜를 적어 둔다. 텍사스에서 11월 3일 중간선거에 투표하려면 10월 5일까지 유권자 등록을 마쳐야 한다. 조기투표는 10월 19일부터 30일까지다. 65세 이상은 우편투표를 신청할 수 있고, 신청서는 10월 23일까지 선거사무소에 도착해야 한다. 등록 여부와 투표소 위치는 VoteTexas.gov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달력에 표시하는 것, 그리고 옆 사람에게 한 번 더 묻는 것에서 시작하자.
투표는 오늘의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우리 자녀들도 머지않아 자기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를 받아 들게 된다. 그때 그들이 물려받을 것이 ‘투표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꼬리표일지, ‘무시할 수 없는 유권자’라는 이름일지는 지금 부모 세대의 발걸음이 정한다. 부모가 줄을 서 본 투표소는 자녀에게도 낯설지 않은 법이다.
우리 손에는 두 장의 투표용지가 있다. 한 장은 우리가 뿌리내린 땅에, 다른 한 장은 우리가 떠나온 땅에 우리가 여기 있다고 알린다. 지금 당장 앞에 놓인 것은 11월 3일의 한 장이지만, 한 장을 제대로 쓰는 습관이 다른 한 장의 무게까지 바꾼다. 동포들이 세금을 내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그리고 한인은 투표하지 않는다고 계산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대답은 말이 아니라 투표함 속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