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서적 안정감 높이고 회복탄력성 키워 …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조부모의 역할
미국 청소년의 정신건강 문제가 사회적 과제로 떠오르면서,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과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데 가족의 역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최근에는 부모뿐 아니라 조부모를 포함한 확대가족이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와 전문가들의 조언이 이어지고 있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미국 청소년의 정신건강 문제는 최근 수년간 중요한 공중보건 과제로 다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 정신건강을 보호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가족과 학교, 지역사회와의 긍정적인 유대 관계를 꼽는다. 아이가 어려움을 겪을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서적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 조부모와의 관계가 아이에게 주는 긍정적 효과
미국 코넬대학교 의과대학(Weill Cornell Medicine) 임상심리학 교수이자 아동심리 전문가인 케네스 배리시(Kenneth Barish) 박사는 조부모가 아이들에게 중요한 정서적 자원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부모가 일상 속 규칙과 책임을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면, 조부모는 보다 여유로운 관계 속에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구들은 아이들이 가족 안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할수록 스트레스 상황에 더 잘 대처하고, 자존감과 사회성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한다. 조부모와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은 아이들에게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조부모는 가족의 역사와 경험을 공유하며 아이들의 정체성 형성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가족 이야기를 듣고 세대 간 유대감을 느끼는 경험은 아이들에게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 부모에게도 필요한 ‘양육 지원군’
조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에게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현대 사회에서 부모들이 과거보다 적은 가족·지역사회 지원 속에서 양육 부담을 감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고 육아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조부모의 정서적·실질적 지원은 부모가 보다 안정적인 마음으로 자녀를 돌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아이들 역시 부모 외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과 관계를 맺으며 다양한 관점과 삶의 경험을 접할 기회를 얻는다.
물론 양육 방식에 대한 세대 차이로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조부모가 부모의 양육 원칙을 존중하고, 부모 역시 조부모의 경험과 도움에 감사하는 태도를 가질 때 세대 간 협력이 더욱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중요한 것은 양육 방식의 우열이 아니라, 아이가 여러 어른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
전문가들은 성적과 성취 중심의 양육 문화가 아이들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높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좋은 성적과 뛰어난 재능만 강조할 경우 아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결과에 따라 판단하기 쉽기 때문이다.
반면 친절과 배려, 공감 능력과 같은 사회·정서적 역량은 아이들의 전반적인 행복과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요소로 꼽힌다. 가족 구성원들과의 따뜻한 대화와 정서적 지지는 아이들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조부모가 손주들과 대화할 때 성적이나 성과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친구 관계, 관심사, 최근 즐거웠던 일 등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관심을 가져주는 어른과의 관계를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조부모의 실천법
조부모가 아이들의 정서 발달을 돕기 위해 거창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 속 작은 행동들이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첫째,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기다. 문제를 바로 해결해 주려 하기보다 아이의 감정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둘째, 결과보다 노력을 칭찬하기다.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자 캐럴 드웩(Carol Dweck)의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 연구에 따르면 “정말 열심히 했구나”와 같이 노력과 과정을 인정하는 피드백은 회복탄력성과 도전 의식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셋째, 함께 놀이와 취미 활동하기다. 산책, 보드게임, 요리, 책 읽기처럼 특별하지 않은 시간도 아이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될 수 있다.
넷째, 가족의 경험과 가치를 나누기다. 어린 시절 이야기나 어려움을 극복했던 경험을 들려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삶의 지혜와 소속감을 전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맞벌이 가정 증가와 핵가족화로 가족 간 교류가 줄어드는 시대지만, 조부모와 손주가 함께하는 시간은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전망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완벽한 조언보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성취와 경쟁이 강조되는 사회 속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보다 “언제든 내 편이 되어주는 어른이 있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