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데스크칼럼
‘고엽(枯葉 / Autumn Leaves)’과 윤정희와 이어령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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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가 입동(立冬)이었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는 절기(節氣)의 알림이었다. 산책길에서 코끝에 스치는 바람 냄새가 싸늘하다. 지난 밤엔 기온이 첫 영하가 되었다. 가을도 다 갔다는 얘기다. 엊그제만 해도 이 더위가 언제 물러갈까 싶었는데 어느덧 이파리가 누렇게 낙엽 되어 바람결에 맴돌아 떨어지고 있다. 그래도 하늘은 아직도 마냥 끝없는 블루(Blue)다.
연륜이 쌓여지면서 가을이 깊어지면 왠지 가슴이 소리를 낸다. 부정맥 환자처럼 두다닥 두두근… 두근거림은 프랑스 말로 파담파담(padam padam)이라 한다는데, 심장 뛰는 소리를 나타낸다고 한다. 표현이 참 재미있어 구글에 찍어보니 ‘두근두근’ 정도의 표현이란다. 과거의 추억이며 심장의 고동소리이기도 하다는, 다소 철학적인 해설이라 피식 웃음이 났다. 아뭏든…왠지 모르지만 가을이 깊어지면 시시로 가슴속에서 가늘게 두드리는 드럼 소리가 들린다. 청춘 시절 봄날에 느끼던 그것과는 또 다른 ‘늘그니’들만이 느끼는 북망(北邙) 산자락에 다가가는 그런 시그널 같은 두드림이다.
암 투병을 하시는 이 시대의 석학(碩學) 이어령 선생은 신문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겨울을 느낀다, 내게도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정원에서 울던 새, 어김없이 피던 꽃들… 모든 것들이 원래의 곳으로 돌아간다. 이는 새로운 태어남을 위해 돌아가는 소리다”라고. 그리고는 “나의 기도는 이것이에요. 어느 날 문득 눈뜨지 않게 해주소서. 내가 갈피를 넘기던 책, 내가 쓰던 차가운 컴퓨터…그 일상에 둘러싸여 눈을 감고 싶어요…” 하면서 삶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분은 죽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배우 윤정희가 5년째 치매를 앓고 있다고 한다.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밝혔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분간 못 하고 왜 거기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녀는 과거 인터뷰에서 “그레타 가르보처럼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다가 스톱하지 않을 것”이라며, 삶이라는 게 젊을 때도 아름답지만 나이 들어도 근사하고 건강하게 늙고 싶다고 했다는데….어쩌다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 날에 그런 소식이 날라 들었는지 안타깝다. 그녀 역시 누구든 지처럼 어느 날 그렇게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일까.
뭐 마땅한 노래가 없을까…컴퓨터를 뒤적인다. 어디선가 기억에 쟁여졌던 노래 한 곡을 찾아 볼륨을 올려본다. ‘고엽(枯葉 / Autumn Leaves)’이라는 이브 몽땅의 노래였다. 늘 가을의 대명사가 되었던 노래였다. 달린 해설을 보니, 이브 몽땅은 자신의 배우 데뷔작으로 1946년 개봉한 마르셀 까르네 감독의 작품 <야간문(Les Portes de la nuit)>이란 영화에서 이 곡을 직접 불러 대표적인 샹송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고 했다. 이 노래는 사랑했던 한 사람과의 과거를 회상하며 그가 떠나버린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고 쓰여져 있었다. ‘떠나버린 안타까움’… 공연히 치매 걸린 윤정희가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정작 내가 들은 곡은 가장 널리 알려진 영어 번안 가사인 넷킹 콜의 노래였다. 1956년 존 크로포드와 클리프 로버트슨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에서 명가수 냇 킹 콜이 부른 스탠다드 재즈 버전이란다. 후에 이 곡은 일본에서 ‘고엽(枯葉)’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이 제목이 그대로 우리나라로 넘어온 것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가사를 보니 새삼 바로 한 편의 시(詩)였다.
The falling leaves drift by the window / 이파리들이 창가에 흩날리네
The autumn leaves of red and gold / 붉은 색 금색의 가을 낙엽들
I see your lips, the summer kisses / 그대 입술을 보네. 그 여름날의 입맞춤
The sun-burned hands I used to hold / 내가 꼭 잡았던 햇볕에 탔던 손
Since you went away the days grow long / 당신이 떠난 이후 하루하루가 지루해
And soon I’ll hear old winter’s song / 곧 내겐 겨울 노래가 들릴 겁니다
But I miss you most of all my darling / 하지만 난 너무 당신이 그리워요 내 사랑.
When autumn leaves start to fall /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이 곡은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가수들이 불렀다고 전한다. 그 중 1955년 피아니스트 로저 윌리암스가 가사 없이 피아노 연주만으로 발표된 곡이 압권(壓卷)이라고 한다. 상징적인 음계(音階)로 대표되는 선율은, 특히 낙엽 떨어지는 느낌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 한 표현이 절묘하다고 했다. 혹 이 곡을 백건우가 연주하면 윤정희가 제정신이 돌아올까…뜬금없이 잘 알지도 모르는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Autumn Leaves’… 베란다에서 낙엽 떨어지는 모습을 내다보며 마음이 숙연해 진다. 낙엽처럼 황혼에 든 자신에 대해서, 또 살아온 삶에 대해 나 역시 새삼 생각을 모아본다. 푸르렀던 여름날에는 세상의 온갖 허세 다 부리고 다녔으면서도, 때 늦게 바람 끝에 떨어지는 색 바랜 나뭇잎 하나에 가슴이 아파온다. 한 시절 사랑했던 모든 것에 대한 뭔가의 회한(悔恨)이 가슴에 스미는 것은 이제 조금쯤 ‘겸손’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
손용상 논설위원
본 사설의 논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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