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TN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능소화의 얼굴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37회 작성일 25-07-26 04:18

본문

김미희 시인 / 수필가
김미희 시인 / 수필가

“속이 다 시원해. 십 년 묵은 체증이 이제야 내려간 것 같아!”


  밤늦은 퇴근이었지만, 집에 오자마자 불을 켜고 뒤란으로 나갔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참아왔던 날이 드디어 오늘이었다. 끝내 참지 못하고 뒤란 정원을 깨끗이 뒤엎어 버렸다. 능소화가 한창이었지만, 정원에 퍼진 줄기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미 무성하게 우거져 숲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작년 늦가을, 일요일 아침에 큰 용기를 내어 옆집 문을 두드렸던 적이 있다. 대답이 없어 그냥 돌아오긴 했지만, 다시는 내 정원이 짓밟히는 꼴을 두고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섰다. 그 후로 다시 찾아갈 용기는 없었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을걷이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치운 정원이 다시 숲이 되어버린 것을 보니, 이제는 꽃이 더 이상 꽃으로 보이지 않는다.


  능소화를 처음 본 건 이 집으로 이사 와 처음 맞은 여름이었다. 옆집 담장을 넘어온 주황색 꽃이 너무 반갑고 예뻤다. 매일매일 한 뼘씩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반기던 그 모습에 내 세상까지 밝아지는 듯했다. 잘 가꿔진 뒤란 정원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었고, 자랑이 되기도 했다. 그 뒤로 몇 해 동안 능소화는 환영받는 꽃이었다. 강렬한 텍사스 여름에도 시든 기색 없이, 한결같이 싱싱하게 피어 여름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능소화는 더 이상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얄밉다는 생각이 들 무렵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이 정도쯤은 내가 통제할 수 있겠다고 여겨, 올라오는 줄기들을 바로바로 잘라내며 버텼다.


  기웃기웃 담장을 넘어와 흔들던 손엔 더 이상 ‘가냘프고 애처로운 소화’라는 궁녀의 전설이 담겨 있지 않았다. 능소화는 스스로 설 수 없기에 누군가를 휘감거나 다른 물체에 붙어 타고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지지대가 되어준 존재를 가차 없이 짓밟아 버린다. 그러면서 영역을 넓힌다. 여름 내내 지지대가 되어주던 작은 나무들은 지네발처럼 생긴 흡착 뿌리에 기가 다 빨려 크지도 못하고 시름을 앓다가 결국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그렇게 옆집 담장을 넘어온 능소화는 서서히 우리 집 뒤란 정원을 점령해 갔다.


  온갖 봄꽃이 지고 세상이 초록으로 물들면, 능소화는 주황색 나팔을 주렁주렁 매달고 또 담장을 넘는다. ‘능소화’는 ‘업신여길 능凌’, ‘하늘 소霄’ 자를 쓴다. 즉, ‘하늘을 업신여기는 꽃’이라는 뜻이다. 무서운 이름답게 그 모습은 온 세상을 뒤흔드는 그러나  말도 안 되는 헛소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머릿속을 숲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억처럼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그 기억은 마치 비웃음처럼 다가온다. 남의 행복을 웃는 얼굴로 무너뜨리는 꽃. 감언이설로 다가와 사람을 홀리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짓밟고 떠나는 무서운 존재 같기도 하다. 너밖에 없다고, 가족이라며, 하나뿐인 동생이라며 앞에서는 세상에 없는 다정한 얼굴이다가, 등 뒤에선 험담과 이간질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검은머리짐승처럼 느껴졌다.


  내 삶에서 한 사람을 송두리째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맑은 웃음에 좋은 인연이 오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좋은 인연은 끝이 좋아야 한다고, 무심코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려면 오래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젠 이런 생각을 한다.


  사는 대로 살다가도, 문득 그때가 생각나면 속아 살았던 내 자신이 용서되지 않는다. 평생을 안고 가야 한다면 견디리라 다짐 한 적도 있다. 보일 때는 그렇게 견뎠고, 더는 볼 수 없게 되자 잊은 척 살기도 했다. 하지만 지네발 같은 흡착 뿌리는 내 마음속 정원에 기생하고 있다가 수시로 줄기를 밀어 올린다. 믿었던 세월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흡착 뿌리도 힘을 잃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강한 생명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능소화처럼 맑은 얼굴로 내 정원을 짓밟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즐겁지 않은 자리는, 그곳이 어디든 가지 않게 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과 만나는 시간에 집중하려고 한다. 귀 아픈 소리는 듣지 않으려 하고,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에 흥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마음은 함부로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끝내 버텨야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래 남는 사람이 되고 싶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RSS
KTN 칼럼 목록
    조나단김(Johnathan Kim)-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졸업- 現 핀테크 기업 실리콘밸리 전략운영 이사최근 미국 대학 입시에서는 '시험성적 선택적 제출(test-optional)'이라는 표현이 익숙해졌다. 팬데믹 이후 수많은 대학들이 SAT와 ACT 점수…
    교육 2025-07-26 
    자동차도난과 보험 자동차를 구입하기로 결정한뒤에 자동차의 종류에따라 각기 다른 사고위험성과 이로인한 보험비용을 검토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검토해 볼것을 권합니다. 고속도로 사고 자료조사기관중에 하…
    리빙 2025-07-26 
    아스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설레임에 풍성한 여행계획과 여행의 만족을 기대 하면서 특히 록키 산속의 아름다운 뮤직텐트에서 최고의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기대할 수 있다는 흥분감에 긴 장거리 여행의 피곤함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창가로 끝없이 펼…
    문학 2025-07-26 
    2025년 7월 4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대적인 세제 개편안인 “One Big Beautiful Bill Act”(이하 OBBBA)에 서명하며 공식적으로 법률로 제정하였다. 이 법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웠던 ‘세금 단순화’와 ‘미국 중산층 회복’을 위…
    회계 2025-07-26 
    공학박사박우람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지구의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다며 떠들썩했던 시절이 있었다. 오존층은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외선을 막아주는 차단막 …
    리빙 2025-07-26 
    “속이 다 시원해. 십 년 묵은 체증이 이제야 내려간 것 같아!” 밤늦은 퇴근이었지만, 집에 오자마자 불을 켜고 뒤란으로 나갔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참아왔던 날이 드디어 오늘이었다. 끝내 참지 못하고 뒤란 정원을 깨끗이 뒤엎어 버렸다. 능소화가 한창이었지만, 정원에 퍼…
    문학 2025-07-26 
    로키산맥을 동서로 연결하는 82번 도로를 따라 10000 피트가 넘는 로키의 멋진 산의 그림자를 담고 있는 Twin Lakes과 더불어 포장된 고갯길로 미국에서 가장 높은 고갯길인 해발 12,095 ft (3,687 m) Independence Pass를 지나 저 멀리…
    여행 2025-07-19 
    엑셀 카이로프로틱김창훈원장Dr. Chang H. KimChiropractor | Excel Chiropracticphone: 469-248-0012email:[email protected] MacArthur Blvd suite 103, Lewis…
    리빙 2025-07-19 
    지난 독립기념일, 텍사스 중부 힐 컨트리 지역에 국지성 폭우가 쏟아졌다. 5일 새벽 과달루페강(Guadalupe River) 수위가 45분 만에 26피트가량 상승하면서 강물이 범람하여 큰 홍수로 이어졌다. 이번 재해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커 카운티(Kerr Cou…
    문학 2025-07-19 
    박운서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Email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미 의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감세법안(One Big Bea…
    회계 2025-07-19 
    사람들과 같이 이상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각자의 지식이나 우월성을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솔직한 생각을 서로에게 할 수 있어 부담이 없습니다. 작품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지만 작품에 대해 느끼는 것을 솔직히 이야기 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
    리빙 2025-07-12 
    지난 7월 7일 미국 연방 국세청인 Internal Revenue Service에서 중대한 발표를 했다. 그동안 IRS는 미국 세법상 501(c)(3) 규정에 따라 면세 자격을 유지하는 비영리단체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1954년 제정된 일명…
    회계 2025-07-12 
    에밀리홍 원장결과가 말해주는 명문대 입시 전문 버클리 아카데미 원장www.Berkeley2Academy.com문의 :[email protected] 미국 대학 순위 리스트 총정리: US 뉴스 vs. 니쉬 vs. 포브스대학은 어디가 좋나요?최고의 레…
    교육 2025-07-12 
    고대진 작가◈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lt…
    문학 2025-07-12 
    크리스틴손,의료인 양성 직업학교,DMSCare Training Center 원장(www.dmscaretraining.com/ 469-605-6035)의료 커리어의 시작, DMS Care Training병원에서 심전도 검사를 받아본 경험이 있으신가요?가슴에 전극을 부착하…
    리빙 2025-07-12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