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I w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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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들이 런웨이에서 워킹을 하다 구두가 벗겨지거나 굽이 부러져 넘어지는 사고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일반인이었다면 놀라서 주저앉겠지만, 프로는 대처법이 다르다. 평소 까치발을 들고 워킹 연습을 해 온 노하우 덕분일 수도 있겠으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자세를 바로잡고 마지막 무대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들의 프로의식에 감동하게 된다. 모델 ‘혜박’이 디올 무대에서 보여준 모습이 그러했다. 구두 굽이 부러졌음에도 흔들림 없이 까치발로 완벽한 워킹을 선보였던 거다. 얼마나 오랜 세월 훈련하면 그렇게 의연할 수 있는 걸까. 피겨 여왕 김연아, 체조 요정 손연재,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사진을 보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정상에 설 때까지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꿈을 향해 달렸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무대에 서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주 넘어지고 일어서는 일상을 살다 보니 병을 이겨내고 일어났거나, 한계를 극복하고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게 된다. 척추에 문제가 생긴 이후 울렁증이 생겼다. 걷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면 꺾여서 넘어지거나 휘청거리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심하게 절기도 하니 이제 정말 지팡이나 워커가 필요한 건가 싶다. 모양 빠지는 게 싫어서 근육 강화를 위해 동네 호숫가를 걷는다. 그곳에 가면 오리들을 만날 수 있다. 몇 마리 없는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은 수십 마리가 몰려와 떼 지어 놀기도 한다. 그 무리 속에서 우연히 다리를 저는 오리를 보게 되었다. 어디서 다쳤는지 모르겠지만 깽깽이로 뛰거나 심하게 뒤뚱거렸고 물에 떠있을 때도 한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건강한 오리들에게 치이기도 하고, 균형을 잃어 허둥거리기도 했다. 장애가 있는 오리는 다른 오리들이 모두 날아가도 홀로 남아 호숫가를 지켰다. 호숫가에 사는 주민들이 먹이를 주어서 굶지는 않았지만, 뒤뚱거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내 모습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어릴 때 불렸던 별명 중 하나가 ‘생기다 만 아이’였다. 툭하면 넘어져서 멀쩡한 타이즈가 하나도 없었다. 타이즈가 비쌌던 시절이어서 외할머니가 구멍 난 타이즈를 꿰매어주곤 하셨다. 무릎 성한 날이 없다 보니 국민 소독약이라고 불리는 아까징끼(赤チンキ)를 달고 살았다. 하루는 오지게 넘어져서 하얀 뼈가 보이도록 무릎이 까졌다. 그날의 통증이 잊히지 않는다. 어머니는 내가 넘어져서 들어올 때마다 화를 냈다.
“너는 생기다 말았니, 왜 맨날 넘어져”
아픈 것도 서러운데 어머니가 화를 내는 게 더 서운했고, 생기다 말았냐는 말이 어린 마음에 가시처럼 박혔다. 초등학교 1학년까지 내 몸무게는 17kg이었다. 2023년 교육부에서 발표한 학교 건강 검사 표본 조사에 의하면 초등학교 1학년 평균 몸무게가 남자는 26.2kg, 여자는 24.6kg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왜소한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발이 또래들보다 현저히 작았다. 어른이 된 후 알았다. 나는 생기다 말아서 넘어진 게 아니라 제 몸무게도 못 받혀 줄 만큼 발이 작아서였다는 것을. 군인 경력이 있는 어머니의 훈육 덕분에 넘어졌을 때 혼자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 일어서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상처를 물에 씻고, 스스로 아까징끼를 호호 불고 바르며 참는 법을 말이다. 어머니는 마흔 여덟, 푸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자식을 오래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던 걸까. 딸아이를 키우며 알았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화를 내는 건 속상함의 다른 표현이고 사랑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어디선가 넘어져 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업이 안돼서,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서, 시험에 떨어져서, 꿈이 좌절되어서, 돈이 없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설 땅을 잃고 코너에 몰린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먹먹하다. 사랑의 화를 내고, 그 상처에 아까징끼 발라줄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럴 때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없는지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며칠 누워 지내는 동안 배롱나무잎에 단풍이 들었다. 깜짝 놀랐다. 창밖에 우뚝 선 주홍빛 우주라니! 봄부터 가을까지 개인기를 보여주고 떠날 준비하느라 분주해진 나무는 마지막 퍼포먼스를 위해 옷을 갈아입은 듯 보였다. 바람이 환호할 때마다 신나게 몸을 흔들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하나 둘 무대를 내려가는 걸 보니 겨울도 머지않은 듯하다.
빈 가지 사이로 앞집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보였다. 낮엔 잔디밭에 벌렁 드러누웠다가 밤이 되어 전기가 들어오면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는 튜브 재질의 산타와 사슴과 소나무다. 마치 재기를 꿈꾸는 사람들 같다. 크리스마스 오르골에서 종일“I Wish Your Merry Christmas” 노래가 흘러나온다. 올 성탄절엔 웅크린 이들의 허리가 쭉 펴질 만큼 좋은 일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나와 가족, 이웃과 우리나라 그리고 온 세상 사람이 행복해지길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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