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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흰 머리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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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TN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4-04-2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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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시인, 수필가


한국에 가야 하는데 출국 전날까지 일이 많았다. 숨이 턱에 닿아서야 미장원에 전화를 걸었다. 예약이 차서 못 해준다고 했다면 포장해 온 나이를 들켰을 거다. 제때 염색을 못하면 영락없이 할머니다. 이젠 새치 커버해달라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드문드문 올라오던 흰머리는 새치 수준이 아니라, 봄볕 제대로 받은 민들레처럼 깔렸기 때문이다. 친구 중에 백발로 사는 부부가 있다. 짧은 커트 머리로 당당하게 다니는데 나름 멋지다. 내 머리카락이 모두 하얘진다면 나도 포기하고 살 수 있을까? 아직은 나이를 인정하는 일이 낯설어서 애써 감추며 버티는 중이다. 

미장원에 가는 것도 일이다. 염색할 때는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성가시다. 오가는 데 드는 시간과 미장원에 앉아 있는 시간을 합하면 족히 세 시간은 쓰게 된다. 시간과 돈을 아껴보려고 댕기머리 염색약을 주문하여 해보았다. 남들은 혼자서 잘도 하드 구먼, 나는 싱크대며 바닥을 온통 염색약으로 도배하고 정작 내 머리는 제대로 물들이지 못했다. 약 바르는 속도도 느려서 한쪽은 진하고 한쪽은 흐린 작품을 만들었다. 지저분한 꼴 못 보는 남편이 그냥 미장원 가서 하라고 했다. 


흰머리를 지우는 일은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일이다. 염색을 하고 나면 젊어 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일주일만 지나면 흰머리가 뽀글뽀글 올라와 모근 주위가 환해진다. 해 아래서 보면 반짝이는 모래알 같다. 염색을 자주 하니 모발이 얇아지고 모근도 약해지고 두피에 종기도 난다. 자다가 긁는지 아침이면 손톱 밑에 피가 끼어 있다. 염색하는 횟수를 줄이려면 흰머리를 가리는 수밖에 없다. 새치 커버용으로 나온 커버제를 바르는 거다. 마스카라처럼 생긴 것도 있고 립스틱처럼 생긴 것도 있고 스프레이처럼 뿌리는 것도 있다. 머리카락 색에 딱 맞는 건 없지만 아쉬운 대로 비슷한 걸 골라서 가리마 나뉘는 곳에 바르면 한두 달은 더 버틸 수 있다. 

한국에 온 지 2주가 지났다. 잠시 고개 숙였던 흰머리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거슬렀다. 만나고 가야 할 사람이 많아서 근처 미장원에 예약을 했다. 머리 결 상할까 봐 계속 뿌리염색만 했더니 윗부분이 점점 밝아져서 노랑머리가 될 판이었다. 밑에 머리를 연결해 주긴 했으나 밖에서 보면 색이 조금씩 달라 층을 이루었다. 이번엔 전체 염색을 하여 전국을 통일하기로 했다. 머리도 자르고 색도 한 톤 짙게 했더니 한결 단정해 보였다. 

볼일이 있어 성산로에 갔다. 인근 중학교가 모교여서 이대 후문 쪽 길은 익숙하다. 학교 앞을 지나는데 많은 추억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는 전교생이 단발머리를 했다. 귀밑으로 머리카락이 1센티미터를 넘으면 안 되고 치맛단이 짧아도 안 되던 시기여서 교문을 통과할 때마다 선도부에게 걸릴까 봐 쫄곤 했었다. 그때를 제외하곤 늘 긴 생머리를 하고 다녔다. 어릴 때도 머리가 길었다. 아침이면 엄마가 긴 머리를 묶어 주곤 했는데 얼마나 짱짱하게 빗어 묶는지 눈꼬리가 위로 올라갈 정도였다. 나는 정신이 바짝 드는 그 머리가 좋았다. 걸을 때마다 묶음 머리가 소꼬리 흔들리듯 양쪽으로 흔들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내 모발은 두꺼운 직모여서 풀어 놓으면 찰랑찰랑하니 예뻤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이 고와서 머리숱 없는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나이만 바뀌었지 헤어스타일은 늘 같았다. 파마를 한적도 있는데 얼마 가지 않아 풀어버리곤 했다. 긴 생머리가 제일 잘 어울렸다. 

모교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나는 흰머리 소녀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좋아했던 머리카락은 부석부석하고 윤기가 없다. 그럼에도 긴 머리 소녀의 꿈을 버리지 못해 생머리를 고집하니 마음은 소녀인 모양이다. 염색하는 게 귀찮긴 해도 아직은 머리카락이 자라니 감사하고, 긴 머리가 어울린다고 말해주는 이들이 있어 고맙다. 언제까지 긴 머리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파파할머니가 되어서도 생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싶다. 

얼마 전 속눈썹이 눈을 찔렀다. 비벼도 사라지지 않아서 족집게를 들고 거울 앞에 섰다. 이따금 방향 틀어진 눈썹이 찌를 때가 있어 뽑곤 하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눈알에 닿는 눈썹이 없었다. 손거울을 들고 창가로 갔다. 햇볕에서 보니 흰 눈썹이 눈을 찌르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흰 눈썹이라니! 노인들의 눈썹이 흰 건 그냥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속눈썹에 생긴 흰 눈썹은 충격이었다. 뭐랄까, 갑자기 노인의 반열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 여자가 아닌 할머니가 된 것 같은 절망감에 한동안 우울했다. 그 말을 들은 친구가 웃었다. 겨우 그까짓 걸 가지고 놀라냐고. 뭐 더 놀랄 게 남았다는 걸까? 이젠 그러려니 생각한다. 마음 한 자락 내려놓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나이를 무엇으로 막을까? 잠시 가릴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가릴 순 없을 것이다. 내가 늙어가는 걸 제일 먼저 아는 사람이 가족이어서 다행이다. 최소한 가족은 안쓰러워할 테니까. 발끝에 길게 늘어선 그림자속에 내가 서있다. 긴 머리가 팔랑거린다. 

오늘은 무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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