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백경혜] 내 사랑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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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어디예요?”
고향을 묻는 이에게 서울이라고 답할 때면 가슴 밑바닥에 소리 죽인 한숨 같은 게 있었다. “에이 서울이 무슨 고향인가요. 고향이 없네.”하며 누군가 물색없이 굴 때도 비쭉 웃고 말았다. 중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개천에서 무엇을 잡고, 방아깨비로 무얼 하고, 해 질 녘 능선의 노을이 어떠했다 하며 고향 산천을 그리는 글을 읽을 땐 상상력을 동원하여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본 장면을 끌어와야 했다. 생명력 넘치는 그런 추억 몇 가지를 삶이 팍팍할 때 꺼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정경을 마음의 양식으로 채워 둔 사람들이 무척 부러웠다. 자연을 갈망하는 건 본능일까. 어린 시절에 자연 속에서 충분히 뒹굴어 보지 못한 아쉬움은 일종의 결핍으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을 떠나 이십 년을 낯선 미국에서 애쓰며 살다 보니 할 일이 곰비임비 쌓였고, 고향도 아스라이 잊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늦은 밤, 휴대전화에 저장할 음악을 찾다가 유튜브에서 그 노래를 듣게 되었다.
“부산집 화단엔 동백나무꽃이 피었고, 내 고향 서울엔 아직 눈이 와요… 내 사랑 서울엔 아직 눈이 와요. 쌓여도 난 그대로 둘 거예요.” 인디 밴드 ‘검정치마’의 「내 고향 서울엔」 이었다.
갑자기 울컥했다. 메마른 서울 촌사람의 열등감이고 뭐고, 미대륙을 가로지르고도 태평양을 건너서야 닿을 수 있는 서울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했다. 서울을 ‘내 사랑 서울’로 따라 부르고 보니 켜켜이 쌓여있던 마음속 풍경들이 한 장씩 펼쳐졌다.
그 노래처럼 서울의 겨울은 춥고 길었다. 한강도 얼어버려 스케이트나 썰매를 한 달씩 탈 수 있다고 했다. 꽁꽁 언 한강에는 나가보지 못했지만, 아침에 배달된 우유가 얼어있으면 그날이 몹시 추운 날인 줄 알았다. 유리병에 담긴 서울우유는 병 입구에서 비닐 캡을 벗겨내고, 동그란 마분지 마개를 걷어내야 했는데, 손잡이가 따로 없어서 마개를 자주 우유 속으로 빠뜨렸다. 종이 캡이 열려 고소한 우유 내가 끼쳐오는 순간을 고대하는 만큼 마개를 열 때마다 조바심을 냈다. 그런데, 우유가 언 날엔 마개를 빠뜨릴 염려 없이 느긋하게 뚜껑을 열고 사각거리는 우유를 마셨다. 어린 내겐 그것이 큰 행복이었나 보다. 겨울 아침을 회상하면 언제나 반쯤 얼어 있는 서울 우유병이 먼저 생각난다.
크리스마스이브엔 장갑과 목도리로 무장을 하고 교회에서 짝 지워 준 친구들과 새벽 송을 돌았다. 교인의 집 앞에 도착하여 누군가 시작을 알리면 느닷없는 큰 소리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불렀다. 그러면 집주인이 나와서 칭찬을 해주거나 헌금을 건네주었다. 집안으로 들여 귤이며 초코파이 같은 간식을 내놓기도 했다. 모처럼 밤새워 돌아다닐 특권을 얻은 우리는 추위도 잊고 겨울밤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에 신이 났었다. 한 해가 저무는 그즈음엔 찹쌀떡을 파는 아저씨들도 구성진 소리를 내며 한밤중에 장사를 다녔다. 잠결에 설핏 멀리서 “메밀묵~, 찹쌀떡!”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설날이 머잖구나 기대했다. 특별한 이벤트가 많았던 겨울이 제일 좋았다.
하늘은 당연히 도시 위에도 펼쳐져 있었지만, 건물에 가려져 조각조각 나뉘어 보였다. 용산구 원효로 길갓집에서 살았던 나는 가로수였던 커다란 플라타너스에 기대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쳤다. 마실 온 동네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지비 딸내미 소리가 젤로 크네.” 할 만큼 소리도 우렁찼다. 사방치기 판을 그어놓고 폴짝거리며 땅따먹기 놀이도 했다. 이파리가 널따란 플라타너스는 우리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고, 가을엔 낙엽을 떨구어 계절이 가는 것을 알려주었다. 우리가 놀던 행길 옆으로 차들이 다녔지만, 도로 위는 아직 한적했던 시절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노는 서울 아이들에겐 개울도 없고 따먹을 머루도 없었지만, 하드가 있었다. 어머니를 졸라 50원짜리 동전을 얻으면 구멍가게로 신나게 뛰어갔다. 검은색 동그란 하드 통 뚜껑을 열고 손을 쑥 넣으면 얼어있는 하드가 잡혀 나왔다. 어머니의 지갑이 아무 때나 열리는 것은 아니라서 하드를 얻으려면 고분고분하게 굴어야 했다.
나는 자연을 단편적으로 체험했다. 그늘집에서 떨어지던 송충이, 아버지가 낚시터에서 잡아 온 붕어, 어머니가 손톱에 물들여 주던 봉숭아꽃, 시장에서 손질해 온 닭, 명태를 물고 가던 도둑고양이 그리고 집 앞 플라타너스와 같이.
학교 앞 만화방을 들락거리며 한글을 깨치고, 차도와 나란히 줄 맞추어 걸어서 남산으로 소풍을 다니던 내게 승용차 승합차 화물차들은 흐르는 개울만큼 친숙했다. 쌀이 어디서 나오는지, 비구름이 어떻게 덮쳐오는지, 동백꽃이 언제 피고 지는지 같이 긴 호흡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훨씬 나중에 배웠다. 그 바람에 남보다 조금 늦게 철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도시에도 자연은 어김없이 스며들었고, 그 자애로운 혜택은 도시 아이들도 알아챌 만큼 넉넉했다. 모자란 것은 천천히 채워가면 되겠지. 넓은 세상으로 나온 지금도 나는 여전히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있으니까. 이제는 남의 것 좀 그만 부러워하고 내 것을 잘 간직해야겠다.
뜨거운 달라스 햇볕을 바라보며 눈 내리는 서울과 얼어있는 우유병을 그려본다. 오늘은 그 노래를 반복하여 따라 부른다. 내게도 서울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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