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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캄캄한 오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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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TN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4-06-01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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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희 시인 / 수필가
김미희 시인 / 수필가


‘난장판이 바로 이런 걸 보고 하는 말이구나!’ 폭풍우에 못 이긴 나무들은 가지들이 찢기고 잘려 나가 여기저기 뒹굴고, 가깝거나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는 밤새 큰일을 겪었다는 신호처럼 끊이지 않고 길게 이어지고 있다. 새벽에 나간 전기는 아직도 돌아올 기미가 없다. 시끄럽고 어지럽고 캄캄한 아침이다. ‘혹시’하는 마음으로 간신히 얼굴만 씻고 출근했다. 가는 내내 설마설마 했는데 역시 온 빌딩이 캄캄하다. 전기가 나가면 우리는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다. 당장 따뜻한 커피 한 잔도 내려 마실 수 없으니 말이다. 우산을 당겨쓴 남편이 주차장 가에 있는 ‘잭 인 더 박스’로 걸어간다.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비바람을 헤치며 저벅저벅 걸어 멀어져 간다. 

메모리얼 데이를 낀 연휴라서 만사 다 제쳐두고 이틀을 내리 쉬기로 작정했다. 해가 바뀌면서 일요일도 없이 달려왔다. 마치 폭풍우 속을 헤치고 온 것 같다. 매 순간순간 애쓰지 않으면 살아지지 않는 인생처럼 참 열심히도 살았다.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나에게 그동안 많이 미안했다. 어머니 날에도 생일날이 와도 일을 하느라 엄마한테도 다녀오지 못하고 지나갔다. 오랜만에 소주를 사고 꽃을 골라 엄마한테 다녀오기로 했다. 그동안 엄마 사는 곳에는 많은 이웃이 이사해 왔고 말끔하게 가꿔진 꽃밭은 오월 답게 화사했다. “나는 꽃밭이 좋더라.” 생전에 하시던 말씀대로 엄마는 화사한 꽃밭에서 산다.

폭풍우가 휩쓸고 간 다음 날이었다. 무너진 논두렁을 고치고 돌아오시던 아버지는 음주 운전자에 의해 53년을 겨우 채우시고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떠나셔야 했다. 생때같은 아버지 보내고 엄마의 나날은 날마다 폭풍우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까운 아버지 몫까지 살아 백 살만 먹을 거라고 하시더니 겨우 90을 넘기고 폭풍처럼 떠나셨다. 벌써 7년이 되었다. 엄마는 아버지 계신 고향으로 가기보다는 외롭지 않게 자식들 옆에 있고 싶다고 했다.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가지도 못하는데, 얼마나 기다릴지 생각하면 그저 미안하고 안쓰럽다. 엄마한테 다녀오는 날은 오래 묵혀둔 숙제를 끝낸 것처럼 개운하고 뿌듯하다.

이런저런 엄마 생각으로 훌쩍이다가 새벽 세 시가 지나는 걸 보고 겨우 잠들었다. “쿵!”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여섯 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고 밖을 보니 대문 앞에 주차한 남편 차를 바람에 날아온 쓰레기통이 받은 것이었다. 바람은 온 동네를 집어삼킬 듯 무섭게 으르렁댔다. 앞마당 가의 물푸레나무는 절대 뽑히지 않겠다는 듯 사지를 비틀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삽시간에 몰아치는 천둥 번개에 일제히 잠에서 깬 식구들은 그제야 비설거지를 하느라 분주했다. 밖에 주차했던 남편 차를 차고 안으로 밀어 넣자마자 우박이 떨어졌다. 피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15살에 아버지를 그렇게 잃은 후, 내가 만난 가장 강력하고 어마어마한 태풍이 아니었나 싶다. 텍사스에 토네이도가 다녀갔다는 뉴스를 보고 친구들이 걱정할 때마다 여기는 괜찮다고, 달라스는 자연재해가 별로 없는 살기 좋은 도시라고 자랑했었다. 여기저기서 안녕을 묻는 메시지를 받아내느라 전화통은 불이 붙을 지경이다. 집을 통째로 흔들던 무시무시했던 폭풍우에 비하면 잔가지 몇 개 찢긴 게 다라고 답하고 나니 여러 사진이 카톡방에 올라와 있었다. 어떤 사진은 차가 침수돼 있었고 또 다른 사진은 끔찍하게도 벼락을 맞은 집이 불타고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자다가 벼락 맞은 격이 아닐 수 없다. 

삼 년 전, 그러니까 2021년 2월이었지 싶다. 그 겨울은 또 얼마나 혹독했던가. 영하 16도를 겨우 웃돌았으니 달라스 겨울 날씨 치고는 추워도 엄청 추웠다. 눈꽃이 피는 걸 보고 마냥 좋아했었다. 그래도 한두 번씩 선물을 주듯 오는 눈을 보며 사람들은 옛 추억에 빠지기도 하고 뭉쳐지지도 않는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며 새로운 추억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을 때였다. 그만 단전이 되면서 사태는 심각해지고 말았다. 물론 강추위가 온다는 예보에 비상 대책에 들어간 사람들로 마트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며 삽시간에 쌓여있던 물건들이 동이 났다. 하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 대열에 끼지 못한 우리는 쓰다가 남은 부탄가스 몇 개로 버텨야 했다. 말 그대로 대책 없이 추위를 견뎌야 했다. 이러다 얼어 죽는 건 아닐까 싶게 추웠다. 이불 몇 개로 돌돌 말고 누워도 몸이 좀처럼 데워지지 않던 생각을 하니 그래도 춥지 않으니 다행이 아닐까 싶다. 

해는 뜨고 날은 밝았다. 영원히 맑아지지 않을 것 같았던 하늘은 하얗게 솜이불을 펼쳐 놓고 새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조용해진 세상은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휩쓸려 다니던 온갖 쓰레기들만 모퉁이에 모여 부끄러운 듯 웅얼거리고 사람들은 불이 꺼진 신호등을 조심스럽게 건너며 일터로 향한다. 불이 나간 탐 덤 마트는 자가 발전기를 돌려 겨우 사람들의 필요에 응대하고 31년 만에 생전 처음 가게 소파에 종일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은 나는 이 난데없는 생소함에 어색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멕시코만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기온과 로키산맥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공기가 켄사스 텍사스, 그리고 오클라호마 등 대평원에서 만나 일전을 벌이면서 생기는 것이 토네이도이다. 텍사스 지역으로는 주로 휴스턴지역이 강타를 맞아 왔는데 이번에는 달라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냉기와 열기가 동시에 다녀간 대평원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아닐 수 없다. 100만 가구가 단전 상태로 최소 12시간을 지나야 했고 그제 밤 7시부터 단전된 가게들은 아예 장사를 접은 상태라고 한다. 우리 집과 가게는 단전된 지 28시간이 넘어가고 있다. 이번 토네이도로 집들이 불타고 또, 최소 7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이어졌다고 하니 단전 정도는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오래 지속될까 봐 두려운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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