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TN 칼럼

페이지 정보

작성자 NEWS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0-10-16 09:51

본문

 의자에 올라가 까치발로 섰다. 새 커튼으로 바꾸려고 묵은 커튼을 내리는데 박아놓은 못이 힘 없이 빠지자 기우뚱 내 몸도 함께 흔들렸다.

다른 쪽을 잡고 있던 작은 아이가 겁을 먹고 내려오라고 성화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아이들이 어려서 나 혼자서 못을 박았던 기억이 난다.

할 줄 모르는 내가 억지로 박은 못이니 오죽했을까. 제대로 박지 않아 구부러진 채 박혀있던 못이 무거운 커튼을 오랫동안 잘 견디고 있었다. 장하다.

걱정스러웠는지 큰아이가 공구를 챙겨와 거들어 준 덕에 이번에는 제대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시키는 것도 그렇고, 특히 미국 집의 벽은 약해서 못 박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보니 우리 집 벽에는 꼭 있어야 하는 것 말고는 걸린 것이 별로 없다. 

 

내 유년의 방은 어두운 골방이었다. 안방으로 통하는 미닫이가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조그만 창이 하나 있었지만, 반은 굴뚝으로 가려져 밖을 볼 때마다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창 앞에는 책상과 낡은 나무 의자가 있었고 책상 옆으로 옷을 걸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쪽 벽에는 온갖 것들이 걸려 있었다. 어두운 골방을 탈출하는 꿈을 꾸기에는  세계지도가 최고였다.

가고 싶은 곳을 순서대로 색연필로 마크를 해나갔다. 연둣빛 새순으로 시작된 길이 가지각색 꽃을 피우며 점점 굵고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빠질 수 없었던 것은 가수나 연예인들 사진이었다. 특히 나와 이름이 같은 장미희 씨는 내가 제일 닮고 싶던 배우였다. 거울을 보고 표정을 따라해보기도 하며 어이없게도 배우가 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 덕분에 꿈을 버리지 못하고 연극배우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좋아하던 시 구절이며 신비롭게 나를 흔들던 문장들을 예쁘게 써서 압정으로 꾹꾹 눌러 붙여놓고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필사를 하며 가슴 설레기도 했다.

예쁜 그림엽서들, 친구들이랑 찍은 사진들. 그런 모든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고 무사히 유년을 건너게 했다.

생각해보면 압정 자국으로 성한 곳이 없던 좁은 골방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벽에 압정으로 눌러 놓았던 꿈과 추억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대청마루 벽에는 누렇게 변한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 큰오빠의 첫돌 사진이랑 큰언니 결혼사진도 걸려 있었다. 다른 쪽 벽에는 커다란 일력과 갖가지 모자들이 걸려 있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압정으로 눌러 붙이고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눈여겨보던 곳. 유년의 벽은 그런 곳이었다. 흙냄새 물씬 나는 좁은 내 유년의 골방 벽에는 행복한 추억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가고 싶었고, 하고 싶었고, 그리고 되고 싶었던 내가 아직도 붙어 있다. 

 

코비드 19로 지금은 어디를 가나 유리 벽, 플라스틱 벽 천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얼굴에도 벽을 치느라 마스크에 페이스 쉴드까지 하고 산다.

여기저기 모든 벽에는 안전수칙이며 안전거리 유지, 마스크 착용을 권하는 문구들만 빼곡하다. 열렸지만 정해진 인원수만 들어갈 수 있어 문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보이지만 건너갈 수 없는 유리벽과 사방이 거울인 벽 안에 갇힌 채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지 실험을 당하는 흰쥐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난 주말에는 몇 가지 장만할 것이 있어 정말 오랜만에 쇼핑몰에 갔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확연히 줄었다는 것은 주차장을 들어서면서 이내 알 수 있었다.

쇼핑몰 안에는 폐문한 상점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무척 놀랐다.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상태에서 높은 렌트를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꿈과 희망이 드나들던 문들이 닫혀 캄캄한 벽이 되어 있었다. 벽이 되어버린 문이 다시 열리려면 얼마나 걸릴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것이다. 27년을 한 자리에서 장사를 하다보니 모두가 이웃같다. 

일부러 들러 괜찮냐는 안부를 묻는 사람도 있고, 가게를 꾸려가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며 따로 봉투를 쥐여주고 가는 손님들도 있고 카드로 긁고 가는 손님들도 종종 있다.

당장 필요치 않은 옷가지들을 챙겨와 맡기고 가는, 그런 고마운 손님들을 생각하면 이 시기를 잘 이겨내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며칠 전에 친구한테 받은 문자와 사진 때문이었을까, 폐문한 상점들을 지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잘 있어?”하고 느닷없이 안부를 묻더니 사진 몇 장과 함께 “오늘은 내가 참 착하지?”하고 전에 없던 애교로 당황하게 했다. 사진 속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가슴 속에 닫혔던 문이 한순간에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그 문으로 우주의 주파수가 다 모여들어 프로방스 태양의 기운이 막 도착한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막상 문자를 받고 보니 많이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고독하고 외롭고 고요했던 내 안이 알전구가 켜진 것처럼 밝아지는 걸 느끼는 순간,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년의 미닫이를 열면

두 배가 넘었던 방이 

두 배가 넘는 사방 벽에 갇힌 채

그때 그대로다

 

마주 보이는 벽에는 아직 세계지도가 걸려 있고

나의 미래는 나의 깨금발 높이에서

연둣빛 압정 머리들만 누구이기를 비는 열망으로

부단한 횡대 대열로 박힌 채 녹내를 풍기고 있다

 

어딘가 가고 싶은 곳은 막연한 희망이었을까

누군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직도 알지 못하는데

그곳에서 걸었던 나의 기대는 그대로

나였던 나인 채 가슴 두근거리는 내외에 지금도 빠져있다

 

길을 모를 때이니 길을 알지 못한다며 나서지 못했고

길을 보았다 한들 내 키로는 어림없어

꼽발 딛어가며 박아대던 압정은 모두가 같은 높이로

지금도 그대로 있다

 

나는 떠나며 다시 미닫이를 닫는다

벽은 그 안에 있어도 항상 내 안에 있다

 

 

벽, (김미희) 전문


 

김미희

시인 /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RSS
KTN 칼럼 목록
    햇살이 빠르게 하향곡선을 그으며 뜨겁던 태양의 열기가 식고 날씨가 선선해지자 뒷마당에 가을이 들기 시작했다. 남편이 정성껏 가꾼 열 포기 정도의 깻잎 덕분에 봄부터 나눔이 풍성했다.쌀 반톨보다 더 작은 들깨씨가 자라 두 아름이 넘도록 가지가 퍼지고 잎을 내주었다. 우리…
    문학 2020-10-23 
    「이것 놔요, 가족을 찾아야 해요」어느 날 카티아는 남편 누리의 사무실에 6살 아들 로코를 데려다 주고, 동생 비르깃을 만나러 간다.카티아는 사우나에서 임신한 비르깃과 편안한 시간을 즐기고, 다시 누리의 사무실로 갔는데, 경찰차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불…
    문학 2020-10-23 
    미국 대통령 선거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다. 과연 누가 대권을 차지 할지 한치 앞도 장담 할 수 없어 보인다. 이러한 와중에 상당수의 헐리우드 셀럽들이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우리의 자랑거리인 방탄소년단과 빌보드 …
    회계 2020-10-16 
    의자에 올라가 까치발로 섰다. 새 커튼으로 바꾸려고 묵은 커튼을 내리는데 박아놓은 못이 힘 없이 빠지자 기우뚱 내 몸도 함께 흔들렸다.다른 쪽을 잡고 있던 작은 아이가 겁을 먹고 내려오라고 성화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아이들이 어려서 나 혼자서 못을 …
    문학 2020-10-16 
    가을 먹거리 중 하나인 대추는 10월 제철 음식으로 100g당 99kcal로 다양한 효능과 달콤한 맛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99kcal는 다이어트 중인 분들에게는 칼로리가 다소 높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대추’ 하면 삼계탕이 가장 먼저 생각나시겠지만, 가을철 알러지성 …
    리빙 2020-10-16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연착륙한 유대인들은 창의적 아이디어, 콘크리트 단결력, 놀랄만한 성실함 등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소수그룹에서 주류사회로 급부상하면서 그 재능과 자질을 과시하는데 있어 주저함이 없어왔다. 부동산 역시 예외가 아니다.원래 유대인들은 전…
    부동산 2020-10-16 
    1. 아르바이트로 피자배달을 하다가 사고가 나면 보험으로 보상이 가능한가?피자배달도 일종의 상업행위이므로 당신의 자동차가 개인 용도로만 사용되는 차라면 상업용으로 커버 받기 위해서는 Policy를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신의 커버리지를 확인해보지 않고 보험회사에서 …
    리빙 2020-10-09 
    작년 이맘때 남편과 나는 여수, 순천을 둘러보고 일행과 떨어져 하동 송림과 화개 쌍계사를 둘러볼 참이었다.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니 이른 아침 6시 반에 포항 가는 기차가 있었다. 내친김에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달리는 기차를 타보고 싶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면…
    문학 2020-10-09 
    「너를 죽도록 사랑해」엄마 엘리사는 임신 중이다. 어느 날 엘리사는 양수가 터져 병원을 갔는데, 의사로부터 딸이라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다.그런데 잠시 후, 의사가 초음파 검사에서 엘리사의 몸에 종양이 발견되었는데, 유방암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엘리사는 …
    문학 2020-10-09 
    역류성 식도염은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위장질환입니다. 하지만 이 흔한 위장질환이 척추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척추 중에서도 등 가운데에 해당하는 흉추는 위장을 포함해 흉부 안쪽에 위치한 장기들의 기능을 조절하는 신경이 …
    리빙 2020-10-02 
    미국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린 미국 전 연방 대법관으로 지난 27년 동안 연방 대법원을 지키며 양성평등과 소수자를 위한 판결을 이끌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지난 9월 18일 암투병 끝에 췌장암 합병증으로 87세를 일기로 타계하면서 그 공석을 채울 연방 대법관에 이목이 …
    회계 2020-10-02 
    하와이에서 생긴 일 (30)“여기는 뽕나무 밭이네. 여기서 누에 치나?”“상필 씨는 뭐든 반은 맞아.”“반만 맞아도 어디야. ““이 나무들은 뽕나무과인 빵나무야.“빵나무라니, Bread Tree란 말야? 우리 시골 집 감나무 만큼 큰데?”“Breadfruit Tree라…
    문학 2020-10-02 
    ‘핵산’은 핵단백질의 비단백부분으로, 모든 생체세포 속에 들어있는 우리 몸에 중요한 성분입니다. DNA(Deoxyribonucleic Acid)와 RNA(Ribonucleic Acid)라는 두 종류가 존재하며, 인간은 핵산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인간의 몸은 약 60…
    문학 2020-10-02 
    존 템플턴은 뉴욕 월가의 전설적인 편드 매니저다. 그는 글로벌 투자의 선구자이며 탁월한 통찰력과 전 세계를 내다보는 폭넓은 시야의 소유자로 50여 년간 지속적으로 높은 수익을 실현했다. 그러나 고매한 인격과 높은 도덕성, 박애정신으로 더 존경받는 인물이다.1912년 테…
    부동산 2020-10-02 
    집보험에 가입하면서 또는 가입 후에라도 집보험의 보상혜택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동차 보험은 장기적으로 볼 때 사고와 클레임을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되므로 보험혜택의 내용을 그래도 좀 아는 편이지만 집보험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그러다 보니 집보험 가입자…
    리빙 2020-09-25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