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아, 테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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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두석 씨는 노려보던 포도주잔을 들어 냉수처럼 꿀꺽꿀꺽 마시더니 마치 석고대죄 하듯 두 팔을 식탁위에 내던지며 머리를 아래로 처박았다.
“뭐야, 정말 인생이 왜이래? 도대체 왜 이러냐고, 아, 테스형!”
그러더니 이내 숙였던 머리를 번쩍 들고 주먹으로 식탁을 쾅 치며 또 불평을 쏟았다.
“아니, 기왕에 줄 거면 하루라도 빨리 줄 것이지, 사람 죽는 꼴 보고나서 줄래? 뭐야, 트럼프가 문젠줄 알았더니 낸시가 더 문제야, 협상은 무슨 놈의 협상, 마른멸치같이 생겨가지고 까탈이나 부리잖아. 어휴, 그나저나 김 여사는 지금 뭐하고 있으려나.....”
나 선생은 절반이나 비워진 포도주병을 바라보며 김 여사를 생각했다. 그녀의 생일을 맞아 프로포스하며 멋지게 러브샷을 하려고 준비했던 와인이었다. 나파벨리여행 갔을 때 오늘의 거사를 위해 거금 백 달러나 주고 산 포도주다. 그 비싼 술을, 술맛도 모른 채 괴로워하며 혼자 마시게 될 줄이야 그때는 공상으로도 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휴대폰을 집어들던 나 선생은 아니야, 이럴 땔수록 침착해야지, 하며 열었던 폴더를 탁 덮고는 멀건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누구라도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나 선생은 제2차 경기부양금이 늦어도 9월 안에는 나오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1차 경기부양금을 받아 빈집에 들어온 소처럼 후딱 잡아먹고 포만감에 젖어 배 두드리고 있을 때만 해도 2차 부양금 나오는 것은 따 논 당상이려니 했다. 7월 초에 나온다, 아니, 월말을 넘기지 않는다, 늦어도 8월 중순에는 부양체크가 통장에 꽂힐 것이다, 이런 뉴스가 책장 넘기듯 술술 넘어갈 때만 해도 나 선생은 느긋이 웃으며 여유 만만했다. 아무려면 9월 안에는, 하고 넉넉히 잡은 것도 10월의 끝 날에 든 김 여사의 생일을 염두에 두고 여유를 부린 것이었다.
그런 틈틈이 김 여사와 함께하는 두 사람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계산하고 꿈꾸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다. 그가 받는 한 달 천여달러의 쇼셜연금으로는 방세, 차량유지, 식품구입비 등의 지출로 가계부가 빠듯하지만 김 여사와 합치면 지출은 거의 그대로이고, 쇼셜연금은 두 몫으로 늘어나니 생활에 한결 여유가 생길 터였다. 그러면 문화생활도 즐기고 여행도 다니며 인생후반을 제법 보람차게 영위하리라, 흐믓한 미소를 짓곤 했다.
“나 선생, 꿈 깨세요. 어느 여자가 대궐 같은 아들집 놔두고 손바닥만 한 노인아파트에 들어와 산답디까? 나 선생이 지금 콩깍지가 씌어서 그렇지 김 여사 만만한 여자 아닙니다, 괜히 상처받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세요, 현실을.”
“아니, 현실을 직시하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그래도 총무님을 믿고 한 말이었는데 아주 사람을 우습게보시는군요, 노인이 노인아파트에 사는 게 부끄러운 일입니까? 허, 참.”
나 선생이 그쯤에서 돌아섰기에 망정이지 한 마디만 더했더라면 산악회총무와 시비가 벌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박 총무가 김 여사를 얼마나 잘 알아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지만 그녀와 제법 깊은 이야기까지 나눈 나 선생으로서는 자신에 대한 모욕감은 차치하고 둘 사이의 순수함이 회손 되는 것 같아 한동안 분함을 삭이지 못했다.
“아유, 두 사람이 살아도 넉넉하겠어요. 아이들 키울 것도 아닌데 크면 뭐하겠어요, 집 크면 일만 늘어나잖아요, 누가 청소할 건데요?”
언젠가 나 선생의 원 베드룸 노인아파트에 들어선 김 여사가 발레리나처럼 원피스자락을 날리며 한 바퀴 돌더니 그렇게 말했다. 특히 삐에로 마냥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면전에 다가와 ‘누가 청소할 건데요?’ 라고 한 말에 나 선생은 시쳇말로 뿅, 가고 말았다. 의미심장한 말이며 몸짓이었다. 묻지 않았는데 가장 원하는 답을 들은 것이다. 그 순간 나 선생은 이 사람은 내 여자다! 라는 확신을 하고 말았다. 비극이라면 그 착각이 첫 번째, 두 번째가 바로 경기부양금이었다,
나 선생은 거사를 앞두고 이미 시장조사를 다 마쳐두었다. 코리아타운의 보석가게는 물론이요, 비교적 저렴한 코스코와 다운타운의 주얼리숍까지 두루 발품을 팔며 비교분석한 결과, 그래도 한인이 운영하는 곳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록 작기는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반지를 천 달러 미만의 가격으로 찍어두었다. 그리고 오매불방 그놈의 경기부양금이 나오기만을 느긋한 척, 그러나 애타게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동안 나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은근슬쩍 김 여사에게 암시를 주곤 했다. 기대하시라, 그대의 탄생일을! 고대하시라, 시월의 써프라이즈를! 이렇게 여자라는 고무풍선에 헬륨가스를 잔뜩 불어넣었던 것이다. 그럴 때면 김 여사는 언젠가 노인아파트에서 했던 것처럼 삐에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서 나 선생의 마음을 녹였다.
헌데, 김 여사가 은색테슬라를 타는 노신사의 차에서 내리더라는 소문을 퍼트린 사람은 산악회 박 총무였다. 그러잖아도 정기 산행에 거푸 두 번이나 불참한 김 여사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참에 들은 말이어서 나 선생은 가슴이 털썩 내려앉았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전화를 받는 김 여사의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았다. 두 번 다 몸이 안 좋다고 했는데,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한껏 낮춘 음성이었다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다. 몸이 단 나 선생이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김 여사는 받지 않았다. 음성메시지를 남겨도 답이 없었다. 이런 변고는 나 선생이 시월의 써프라이즈를 연기하면서부터 일어난 일 같지만,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원래 그렇게 돌아가게 되어 있던 것이 제자리를 찾은 것뿐이었다.
“이보게 나 두석, 그래, 여자의 쇼셜연금에나 희망을 걸고, 경기부양금에나 목을 매는 게 그대의 인생인가? 인간 나 두석이 어쩌다 그렇게 쪼그라졌나? 인생이 왜 그래? 총무님이 현실을 직시하라잖아, 현실을......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이야!”
나 선생은 15도짜리 포도주에 취해 가슴을 치며 자책했다. 그리고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얼굴을 탁자위에 떨구고 잠이 들었다. *
이용우
소설가 | LA 거주 작가
1951년 충북 제천 출생
미주 한국일보 소설 입상
미주 한국문인협회 이사
미주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역임
자영업 / LA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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