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백경혜] 똑똑한 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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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백과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약 33%는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은 많아도 성경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몹시 어려워 보인다.
하나님이 사람 마음속을 훤히 아신다는 부분이 가장 난감하다. 하나님은 외모 말고 중심을 보신다고 했지만, 말씀대로 살면 복을 주신다고 구약에서 여러 차례 약속했으니, 행실이 올바르면 큰 타박은 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신약의 예수님 가르침을 살펴보면 말씀을 따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음속부터 깨끗하지 않으면 온갖 선행도 무효가 된다. 원수를 용서하기도 어려운데, 사랑하라고 하신다. 게다가 평생 잘해도 죽을 때쯤 심술을 부려 변절하면 지옥이다. 반대로 평생 제멋대로 살다가 죽기 전에 진심으로 회개하면 받아주시니 약게 굴자면, 마음대로 살다가 죽을 때쯤 되어서 뉘우치면 될 일이다. 다만 누구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게 함정이다.
본능이 꿈틀대는 육신을 입고 저마다 제멋대로 사는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마음을 지키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마태복음 5:38-42 말씀은 세상에서 호구가 되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호구(虎口)는 한자 표기대로 ‘범의 입’라는 뜻이고 주로 바둑 용어로 많이 쓰였다. 상대편 바둑 석 점이 이미 포위하고 있는 상황으로, 위태로워 매우 위험한 처지나 형국을 말하나, 오늘날에는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인다. 나를 먹잇감으로 여기는 자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상대편 바둑돌에 에워싸인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걸까.
크리스천은 어수룩하여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상대인지 알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으로 대한다는 점에서 세상 속 호구와 구별된다. 나를 이용하려 드는 상대인지 뻔히 알아도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이 얼마나 순종하기 어려운 것인가.
나는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 함께 무엇을 하게 될 때 웬만하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마음 편하다. 게다가 교회에서 배워온 대로 이웃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좋은 사람을 만나면 더 없는 우정을 나누었지만, 얌체들에게 걸리면 종종 그들의 호구가 되곤 했다. 오랜 시간을 그들에게 휘둘리고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계속 눈감아 줄 만한 인내심도 없으니 결국 상대에게 화를 내고 만다. 게다가 부족한 자신도 질책하게 된다. 그들은 그런 나를 조롱하며 크리스천은 역시 말뿐이라고 빈정대기도 한다. 좋은 크리스천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태산과 같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인생에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사는 것이 더 힘겹다.
미국의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그의 저서 《기브앤테이크 (Give and Take)》에서 사람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받은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기버(giver)와 준 것보다 더 많이 받으려는 테이커(taker), 그리고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매처(matcher)가 그것이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성공의 사다리 아래쪽에는 기버가 가장 많다고 한다. 그들은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기 때문에 사회의 맨 아래층에 있다. 그런데 사다리 맨 위에도 역시 기버가 가장 많다는 것은 의외의 사실이다. 작가는 최고의 소프트웨어 회사 중 하나인 구글의 성공 원인도 임직원의 절반 이상이 기버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성공하는 기버와 이용당하는 기버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성공하는 기버는 테이커를 알아보고 그들을 거절한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에너지를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나의 이익뿐 아니라 남의 이익에도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는 것이 결국 함께 잘사는 궁극의 성공이라고 한다.
세상의 지혜도 결국 주라고 가르친다. 되돌아보면 나는 교회에서 성장하며 수많은 사람의 보살핌을 받았다. 넉넉하지 않던 시절에도 교회는 따뜻한 가르침을 베풀던 풍요로운 곳이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주었던 선생님들의 시간과 정성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결국 아들까지 내어주신 그 분은 오늘도 기버, 매처, 테이커를 가리지 않고 넉넉한 은혜를 베풀고 계실 것이다.
너희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테이커에게 겉옷까지도 주라는 것이 하나님 수준이지만 나는 내 수준을 알고 있으니 주변 얌체들은 이제 거절해야겠다. 그들은 하나님께 맡기자. 똑똑한 호구가 되어 내가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누다 보면 어느 날, 내 오른뺨을 치는 자도 불쌍히 여기게 되는 날이 혹여 오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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